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pielraum Jan 19. 2023

'시간 꼰대'와 '생계형 꼰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나이 많은 꼰대에서 존경받는 다정한 꼰대로

어느 책에서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문장이 제 기억 속에 흐르고 또 흘렀습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은 비가역적 이어서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내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신체는 헤아릴 수 없는 세포로 만들어졌는데 세포도 며칠이면 새로운 것으로 바뀌고 어떤 것은 수년동안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새것으로 변합니다. 신체는 이렇게 부지(不知) 가운데 변하지만 단지 몸만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형성된 가치관과 기준도 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존재했던 좌표(가치관과 기준)를 지금의 나로 인식하고 그 가면을 벗지 않으면 시쳇말로 영락없이 ‘꼰데’가 됩니다.


국어사전에 ‘꼰대’라는 말을 찾아보았습니다. ‘꼰대’란 ‘늙은이’를 말하는 은어로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을 지칭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나이 많은 선생님과 어른을 비하하는 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왜 존경의 대상인 선생님이 ‘꼰대’ 당사자가 되었을까요? 2019년 9월 23일 영국 BBC방송 자사 페이스 북에서 오늘의 단어로 ‘kkondae (꼰대)’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자신이 항상 옳다고 믿는 나이 많은 사람’, 선생님이 ‘꼰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순전히 저 혼자만의 상상입니다


저는 아직 50대 초반이지만 젊은 후배 직원들에게는 당연히 ‘꼰대’로 보여질 것입니다. 아니기를 바라지만 이 또한 제 욕심입니다.  ‘꼰대’가 ‘자신이 항상 옳다고 믿는 나이 많은 사람’이라면 나이야 어쩔 수 없지만 내 주장이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면 ‘꼰대’라는 소리는 덜 듣지 않을까? 그것이 뭐 그리 어려울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동료, 후배에게는 몰라도, 자식만큼은 그것이 참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모두 ‘꼰대’가 되는가 봅니다.


물리학자, 김범준작가는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고 있습니다’라는 자신의 책에서 세상에는 두 종류 ‘꼰대’가 있다고 했습니다. 같은 분야에서 오래전에 형성된 가치관과 판단기준으로 현재 상황에 적용하는 ‘시간 꼰대’, 그리고 오랫동안 형성된 자신의 전문성을 다른 분야에 적용하면서 항상 옳다고 믿는 ‘공간 꼰대’가 있다고 말입니다.


‘시간 꼰대’는 요즈음 우리가 얘기하는 ‘라테 꼰대’입니다. 이 ‘꼰대’는 회사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친구, 동료직원들과 소주잔을 들면서 “그때가 좋았지!” 라며 추억을 소환하고 과거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경우입니다. 며칠 전 입사 동기들과 저녁을 같이 했습니다. 한잔 술에 곤죽이 된 직장생활의 기억을 소환하고 추억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밥벌이의 삶도 위로하고 격려했고요. 그런데 말이죠. 대화 주제가 20, 30년 전에 머물러 한치도 나아갈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화석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고 또 반복했습니다. 젊은 동료 후배 직원들이 옆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는 꼰대 대마왕이라는 얘기를 듣기에 충분했습니다.


제가 ‘꼰대’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도 종종 젊은 후배 직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기본이 안되었어” 라며 혼자 중얼거립니다. 도대체 ‘기본’이라는 기준은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25여 년 전 제가 도제식(徒弟式)으로 배우고 경험했던 그때의 잣대를 지금 상황에 적용하는 것을 보면 저는 영락없는 ‘시간 꼰대’의 전형입니다. 그래도 ‘시간 꼰대’는 자기가 ‘꼰대’인 것을 아는 ‘꼰대’입니다.


문제는 ‘시간 꼰대’ 보다 ‘공간 꼰대’입니다. ‘시간 꼰대’는 주변에 쉽게 만날 수 있고 확인도 가능하지만 ‘공간 꼰대’는 전문가라는 가면을 쓰고 본인의 지식을 넘어 다른 영역에서도 전문가 행세를 하는 경우입니다. 저는 이런 꼰대를 ‘생계형 꼰대’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전문 영역이 아님에도 마치 전문가처럼 말을 합니다. 회사에서는 ‘생계형 꼰대’ 일 수록 지위가 높은 경우가 많습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위가 높은 분들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상사의 이야기를 아랫사람이 반박하거나 토를 달기 어려운 경우에 ‘생계형 꼰대’는 더 강한 확신과 믿음을 장착하고 자신의 공간과 지경(地境)을 넓혀갑니다.  마치 스스로 옳은 말만 하고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솔직히 이것은 ‘오지랖’입니다. 부하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면 내가 옳은 말만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생계형 꼰대’의 착각입니다. 이런 ‘생계형 꼰대’의 위험성은 스스로 ‘꼰대’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시간의 흐름으로 보면 누구나 ‘꼰대’가 됩니다. 빨리 되느냐 아니면 시간이 더 걸리느냐 차이입니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는 것처럼, 현재는 미래를 향해 흘러가는 강물 위 나뭇잎과 같습니다. 흘러가는 나뭇잎을 지금 형성된 가치관으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현재는 곧 미래가 되니까요.


세상은 변하는데 여전히 과거의 좌표에서 한 발짝도 시간과 공간(전문영역 등)을 이동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큰 일입니다. 내 몸의 세포가 생성되고 소멸되며 다시 태어나듯이 내 좌표의 시간과 공간의 축을 넓혀 간다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나이 많은 꼰대’에서 ‘존경받고 다정한 꼰대’로 변신할 수 있지 않을까요/끝.

매거진의 이전글 임금피크제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