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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겨울의 섬들

Essay? 그리고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by 사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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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친구들 사이에서 ‘13년 XX’ 라고 하는, 이를테면 마구마구 년도별 선수카드처럼 어느 한 시기의 나를 가리키던 농담이 있었다. 그러니까, 2013년이라고 하면 내가 대학교 4학년일 때이다. 여기서 일단 이게 좋은 뜻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분명 2013년의 시작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었다고 기억한다. 시카고에서 새해 첫날을 맞이하고, 귀국해서는 오랜 인연이었던 Y와 불현듯 만나게 되었다. 어쩌면 2013년의 불행은 그해 4월 무심코 연락이 두절된 Y가 그 시작이었을 수도 있다.


2013년 12월 31일 밤, 나는 내게 F를 준 교수를 찾아가 학점 구걸을 하고 나와 신촌거리에서 혼자 매우 늦은 저녁을 때웠다. 어쨌거나, 나는 멍청하지는 않았어도 그리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고, 그가 D라도 주지 않는다면 졸업을 한 학기 미뤄야 할 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그리 나쁜 방법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 어쨌든 그때는 심각했다. 밥을 먹고 나와 한산한 거리를 보며 무엇인가를 느꼈다. 그러니까, 전에 없이 명료하게 그 단어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염증. 나를 향해서든, 아니면 다른 모든 것을 향해서든.


그리고 이틀 후인 2일 나는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31일이 아닌 그 일주일 전에 예약한 것이기는 했지만, 사실 31일과 그 일주일 전 사이에 큰 차이는 없었던 것 같다. 나는 5주짜리 방을 예약하고 제주도에 들어갔다. 내가 묵은 곳은 제주 동쪽 구좌읍 세화리의 작은 게스트 하우스였다. 거실에는 옛 책들이 수북히 쌓여있고, 방마다 푹신한 이부자리가 있고, 게스트 하우스에 딸린 작은 카페도 있던,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곳으로 기억된다.


이 긴 과거 이야기를 왜 꺼내느냐 하면,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최소한 나는 그 영화를 보게 되었던 시기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이 때의 제주살이가 내가 여태까지 했던 유일한 도피여행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근 한 달 동안 나는 차도 빌리지 않고 아침이면 일어나 게스트 하우스에서 주는 밥을 먹고 제주일주도로를 도는 순환 버스를 타러 나갔다. 이 버스는 무척 느려서, 제주도 전체를 돌면서 동네 할머니들을 실어나르는 것이 주 업이었다. 그날 그날 갈 곳을 정해서 버스를 타고 나가 구경을 하고 밥을 먹은 뒤 돌아오면 어느덧 저녁이었다. 2주째 부터는 어느덧 친해진 게스트 하우스 주인집과 함께 머물던 두 사람과 함께 다녔고, 특히나 주인집 내외와는 무척 친해져서, 시내를 들락거리던 내가 그들이 부탁하는 것을 사오거나 나눠먹을 특산품을 사와 저녁에 조촐한 술상을 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때 제주도에서 영화를 두 번 보았는데, 게스트하우스에서 버스를 타고 한시간이면 도착하는 제주 시내에는 두 곳의 영화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번 중 하나가 바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였다.


사실 영화 자체는, 이게 인류 영화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만한 뭐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매번 일탈을 꿈꾸면서도 자기 일에만 얽매여 있는 사무직 직원이 어느날 의도치 않은 방황 끝에 삶의 의미를 찾는다, 같은 뻔한 멘트로 요약할 수 있을만한 영화였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온 그 날 나는 답답한 마음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내가 이 영화를 흉내내기라도 한 것처럼 부끄럽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비일상이 비현실적이면서도 사실은 가능할 것도 같다는, 하지만 이는 결국 내가 무엇을 포기하지 못하고, 또 무엇을 감수하지 못하고 있는지 너무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그 시기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가 내게 특별할 수 있었을까? 단언하건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화산섬인 제주도에서 화산섬인 아이슬란드가 나오는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뭐, 그 해가 딱히 내가 연애, 글, 밥벌이 등등 모든 면에서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영화에서 나온 노래가 내가 평소에 그토록 좋아하던 곡이 아니었다면, 그 외 정말… 많은… 일들이 내게 벌어지지 않았었다면. 그랬다면. 하지만 어쨌건 내 삶은 그렇게 이어졌고, 이 영화가 그 사이에 있었다는 건 멋진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때의 나는 어떤 기로에 있었고, 그때까지의 모든 것이 무용했으며,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도, 아니 선택 자체를 해야하는지도 몰랐다. 영화를 보며 인생에 저런 순간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쩌면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뭐, 내 삶의 기조가 이 영화를 본 순간 한 번에 바뀌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분명 나는 이 때문에 무엇인가 바뀐 것을 가지게 됐다. 안그래도 요즘들어 생각보다 어렸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상당히 바뀌어있다는 걸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툴기 그지없어서 모든 것을 힘들게하고 모두를 불편하게하던 그 때는 말이지. 아무튼, 이제 와서 다시 이 영화를 평가하고 싶지도 않고, 그저 그때의 생각대로 곱씹고 싶기만 하다.분명 더 많은 의미가 있는 영화일텐데, 나는 그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에 있었던 매우 중요한 영화였다고 기억하고 싶다. 아, 아이슬란드에는 여전히 너무나 요원한 곳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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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 영화를 보고 나는 예정보다 일주일 이르게 서울로 돌아왔다. 나는 그리 내 밖의 동기로 인해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지만, 2014년에는 유독 마술처럼 그런 일들이 잦았다. 그렇게 제주도를 나온 뒤 석 달 뒤에는 새 연인을 만났고, 그 한 달 뒤에는 첫 직업인 전 직장에 취직했다. 그리고 12월에는 제주도에 돌아갔다, 돌아왔다. 이제는 다 지나간 옛 일이지만, 그냥 그랬다는 이야기다.


오늘 문득 넷플릭스에 올라온 이 영화가 눈에 띄어서 한 번 적어봤다.


https://www.netflix.com/title/70243458

*영화에 서로 다른 버전으로 두 번 쓰인 OST <Far Away>는 락스타 게임즈의 게임 <Red Dead Redemption> 에도 쓰였다. 매우 중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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