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컬 스타트업으로 옮기자마자 나에게 닥친 일
WMW working mom's work를 이야기하려 해요.
워킹맘으로 산지 35개월, 임금 노동자로 일을 한지는 10년.
의류에서 의료로 파격적인 이직을 하고 겪은 첫 번째 사건, 원격의료에 대한 탐구입니다.
행복한 워킹맘의 무던한 일 이야기, 시작합니다.
코로나가 참 많은 것을 바꾸었다. 당신도, 나도, 우리 가족도, 회사도 바꾸고 있다. 왜 이렇게 변화하고 있지?라는 안타까움이 가슴속에 깊숙이 들어올 때 즈음, Youtube와 NEWS에서는 본격적으로 외치고 있더라.
스멀스멀... 바뀌네.. 싶은 것들이 갑자기 전시상황처럼 피부로 느껴졌다. 우리 집은 아직 아이가 어려 변화된 수업 방식의 적용 대상은 아니었지만, 맘 카페마다 zoom 수업 방법에 대한 문제점과 문의사항을 서로 급격히 빈번하게 공유하기 시작했다. 결국 문화센터를 통한 유아 수업마저도 온라인으로 바뀌는 유행이 최근에 시작되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아이마다 옷이 늘 깨끗했다. 미끄럼틀, 시소, 킥보드와 한 몸이 되어 뛰어다녀도 모자를 시간, 2020년 여름은 그렇게 고요하게, 보이지 않는 극강의 더러운 바이러스 공기 속에 매우 깨끗한 척 잔인하게 모든 것을 기여코 흐르게 했다.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어린이집을 보내지 않으면 대안이 없는데 어린이집을 자제해달라고 했다. '다들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하소연이나 넋두리를 할 수 없었다. 나도 잘 살고 있는 척, 힘들게 이겨내는 척(이것은 비단 척은 아니고) 성격이 원만한 아이에게 감사하며 친구가 오지 않는 텅 빈 어린이집에 아이를 등원시켰다. 그리고 미안했다. 누구한테 미안한지도 모른 채 나는 매일 미안했다.
일도 응당 매우 빠르게 바뀌었다.
누구는 이것을 피벗이라 일컫고, 다른 누구는 이런 현상을 뾰족해진다고 표현하더라. 그런데 나는 그냥 이런 일련의 변화무쌍한 업무적 카오스를 통해 내가 아는 세계관이 좀 더 넓어지고, 학문적 지식이나 감성적 지능이 더 단단해지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었기에 변화를 (어쩔 수 없이) 환영했다. 난관일수록 출근하는 이유가 분명했다. 그게 나의 역할이고, 스타트업에 다니는 일종의 베네핏 이기도 했으니까. 내일을 알 수 없어도 최대한 즐기면 되는 거니까. 우리 사업이 가지는 변화 속에(메디컬 업계에 있는 이상) 원격의료를 받아들여 사업적으로 차용해야 하는 순간에 대비하는 그런 스탠스를 감히 (비의료인인) 내가 기획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이 될 수 있음에 어떤 면으로는 진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것이 왜 이리 어려운지 알기 전 까지는 말이다.
뜨거운 감자다. 매우 뜨거워서 누구 하나 자칫하면 화상을 입기 딱 좋은 그렇게 아직은 위험해 보이는... (3년 후는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진료'가 아닌 '이야기'에 집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 워킹맘이 되고 생긴 매우 큰 변화는 '성의 있는 병원 방문'이었다. 근거리 검색, 어지간하면 약국으로 대처하는 (안일한) 증상 및 질환의 리액션에서, 병원을 매우 성의 있게 찾아보고, 의료진을 검색해보며, 마지막으로 주변 평판까지 검증한 후 방문했다. 지금은 덜해졌지만 아이가 매우 어렸을 땐, 꼭 '저명한 소아과'를 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저명한 소아과란?
1. 엄마의 말을 잘 들어주고
2. 아이를 매우 성의 있게 오랜 시간 관찰해 미처 생각 못한 부분까지 해결해주고(귓밥 정리처럼... 무서운 것들요)
3. 항생제가 없는 약과 있는 약을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처방해주되 설명을 친절하게 해주는 곳
이런 소아과들은 보통 #똑닥 같은 어플을 사용하거나 선착순 대기명단 노트를 만들어 토요일 오전 시간을 웨이팅으로 싹쓸이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도 마찬가지. 한참을 기다려 선생님을 뵈었다.
https://www.ddocdoc.com/ (재직 중인 회사는 아닙니다만)
" 피부 발진 때문에 왔어요."
" 'Aqua.....' 크림 안 발라줬어요?" 하면서 역정을 내셨다. '다그쳤다'가 더 정확했다.
(제가 세상의 모든 크림 특성을 알고 있진 않잖아요, 선생님? 제가 더 속상해요!라고는 못했다. 난 의사보다 좀 못 낫기 때문에, 적어도 그 방에선 말이다)
아이가 아픈 것도 속상하고 기다리는 것도 지친다. 그런데 왜 가끔 의사들 앞에서 그렇게 주눅이 드는 걸까? 난 몰랐거나, 궁금했거나, 아팠거나 결국 내 이야기를 하러 간 거다. 최근, 친구는 미국에 출국할 일이 있어 코로나 때문에 걱정이라며 내과 선생님께 말을 건넸단다. 다음 주, 미국으로 출국인데 혹시나 챙길 약이 없냐고. 대뜸 이 시국에 미국에 왜 가냐며 혀를 차셔서 기분이 팍 상해서 나왔다고 했다.
특정 항목을 다루는 병원에 정신 상담하고 심리치료받으러 간 것은 아니지만, 소아과를 비롯, 병원 방문에서 (물론 아닌 상황이 있을 수도) 엄마와 아이, 혹은 보호자와 환자 사이 그 마음과 상처를 표면적으로 내면적으로 위로와 치료받는 그 느낌. 그것도 아주 단순한 포인트로 말이다.
"아이고 아팠겠구나."
"어머니가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어요."
"일단 코로나는 위험하니 마스크 꼭 잘 끼고 다니시고요, 소독제 많이 챙겨가세요."
다들, 이런 대답 원하는 거 아닌가?
#이야기에 집착하다
서비스를 기획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유저다. 유저는 왜 우리 서비스를 사용해야 하는가.
지척이 병원이고, 환자 입장에서 비용도 저렴하다. 사람들은, 나를 포함한 일부 혹은 많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대면을, 지지고 볶고 상처 주고받는 사회의 드라마 속 휴머니즘에 집착한다. 그러나 코로나는 우리 환경을 많이 바꾸었다. 이미 바꾸었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바꿀 예정이다.
당장 원격의료가 시행될 수는 없는 사회적 상황, 원격진료를 그리는 서비스 기획자는 무엇을 기획해야 할까. 내가 유저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인사이트는 무엇이 있을까. 10년 직장생활 중 가장 좋은 사람들이다 싶은 이 팀과 내가 그릴 수 있는 서비스는 무엇일까. 내게 4년만의 이직이 찾아오며 가장 좋았던 점은 내게 의사 친구가 생겼다는 점이다. 대표가 의사이기 때문에 나는 시시때때로 나의 궁금증을, 내 아이에 관한 궁금증을 (병원 방문 전) 미리 공유했고, 짧은 카톡의 대화와 슬랙에서의 몇 마디로 난 숱하게 시간을 아꼈다. 병원에 방문하지 않아도 내일이면 나을 상황, 연고 등으로 간단하게 처치가 가능한 것들은 미리 대처할 수 있었고 시간은 매우 효율적으로 흘렀다.
근데 내가 이직을 안했으면,
이것을 느끼고 살았겠어?
그래서 더욱,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를 함께 공감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 예를 들면,
사실 요새 제가 너무 바빠서 (아이 피부가 이렇게 된 것을 몰랐어요),
요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소화불량이 심한데 어떤 약을 먹어야 할까요?),
마스크 때문에 뾰루지가 낫는데 (병원 가서 약 받아야 해요?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요?),
탈모가 심해서 하루에 얼마큼 빠지는데 (저 병원에 가요? 탈모샴푸로 해결될까요?).....
주절주절 사연 노트를 전송하는 유저들이 생기는 거다.
전제는, 그 사연 노트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좋은)의사'다.
당신이라면 이야기하시겠습니까?
(Yes면 저 좀 알려주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