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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lody Jan 24. 2020

#005 내가 일할 곳을 찾아가는 과정

CV, Covering Letter에게 안녕을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 랩탑을 펴고 Covering Letter를 쓰고 있었다. 나는 지금 며칠 째 Covering Letter 때문에 고군분투 중이다. 사실, 지난 일주일 정도 노력은 했으나 진전이 없고 마감일이 다가오고 있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업무에 여유가 있던 오후부터 진도를 빼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진도를 빼지 못해 여기에 하소연을 하고 있다는 게 정확한 상황 설명이 될 것이다.


다가오는 3월이면 박사 학위를 받고 연구자의 길로 접어든 지 꼭 4년이 된다. 그 며칠 뒤에 그리고 내가 지금 직장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지 꼭 3년이 된다. 물론 지금 직장에서 정년이 보장되는 포지션을 받을 거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고부터 다음 스텝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왔다. 지금 일하는 나라에서 다음 자리를 찾아볼 것인지, 한국에 돌아가서 자리를 찾아야 하는지 조언도 구해보고 나름 생각도 해봤지만 어떤 게 정답인지 사실은 지금도 모르겠다.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앞으로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도 크게 없다. 


커리어에 대한 확고하며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차근차근 추진해가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한 달을 같이 지냈던 선생님은 본인이 생각하시기에 플랜 B는커녕 플랜 A도 제대로 안 갖고 있는 나를 보며 그래선 안된다고 항상 나무라셨다. (덕분에 한 달 동안 소화불량으로 고생한 건 안 비밀이다...) 네트워킹이 중요한 업종이니만큼 인맥 관리도 전략적으로 해야 하고 내가 가진 스펙으로는 지금 일하는 나라에서 다음 스텝을 생각하는 게 가장 최선이라며 나보다 더 구체적으로 나의 커리어 비전을 제시해주셨었다. 그분이 제시하시는 플랜은 누가 들어도 논리적이고 타당하며 가장 실현 가능해 보였다.


안정된 지위와 수입, 이 두 가지가 포인트.

선생님이 제시하신 비전의 핵심은 1) 마흔이 되기 전에 tenure track에 진입해야 한다는 것, 2) 어느 정도 연봉이 보장된 자리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었다. 둘 다 당연한 말이긴 하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나라에서라면 조금 더 노력하면 저 두 조건을 충족하는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낮지도 않다. 연구자에 대한 대우가 점점 팍팍해지고 있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 이 나라는 그나마 아직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자국의 연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 모양이지만...) 실제로 유럽 출신인 동료는 유럽 국가들보다 안정적이고 덜 경쟁적인 점이 맘에 들어 굳이 여기까지 왔노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지금, 안정된 지위와 보장된 수입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은 당연하다. 그런데 나는 저 당연한 두 조건이 그렇게 끌리지 않는다. 혹자는 내가 든든한 뒷배경이라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서민 가정의 외동딸에 불과하다. 물려받을 재산? 그런 것 없다. 나 하나 먹여 살리는 것도 겨우 하는 마당에 아마도 부모님의 노후도 내 손에 달려있는 것 같다. 그럼 당연히 tenure track을 향해 돌진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그 당연한 게 나는 잘 안된다.

나 스스로 정한 타임 리밋이 마흔 살. 그전까지는 해보고 싶은 대로 해보고 싶다. 여기도 기웃거려보고 싶고 저기도 기웃거려보고 싶다. 만약 마흔이 되기 전, 지금 하고 있는 일 보다 더 열정을 바쳐할 만하다고 여겨지는 일이 나타나면 뒤돌아보지 않고 시도해보고 싶다. 아마도 언젠가는 어디엔가 자리를 잡고 살아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여간해서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다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기 어려울 것이다. 부모님이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드시면 더 신경 쓸 일이 많을 테니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지겠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분간 CV와 Covering Letter에게 안녕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쑤시고 다니다 보면 적어도 다음 CV와 Covering Letter에 적을 경력한 줄씩은 늘어나겠지. 다행히도 이 글을 쓰는 동안 어찌어찌 Covering Letter를 완성했다. 다시 읽어보면서 나의 부사 활용 능력이 이렇게도 뛰어났었나 감탄도 해봤다. 아, 이렇게 계속 쓰고 던지다 보면 경력만 느는 게 아니라 문장력도 좀 늘긴 하겠구나. 뭐든 장점은 있나 보다.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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