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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lody Nov 03. 2019

#000 나는 겨울에 아일랜드에 가기로 했다

비바람이 부는 아일랜드의 겨울에는 뭐가 있을까?

아직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이 여행의 이야기는 내 삼십몇 년 인생의 여행기 중 가장 어처구니없고 예측 불가능하며 드라마틱할 가능성이 크다. 비록 몇 년 뒤 다시 꺼내 읽었을 때 손발이 오그라들지언정 기록해두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최대한 솔직하게 탈탈 털어 꺼내 쓸 예정이다. 


나 겨울 방학 때 아일랜드에 가도 돼?

내가 한겨울, 그것도 12월 말에 아일랜드를 가게 된 이유는 바로 저 한 마디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가끔 무모할 정도의 일을 고민 없이 빨리 결정하는 편인데, 이번 아일랜드 여행이 그렇다. 올여름 우연히 알게 된 아일랜드에서 온 청년이 있다. 나는 이 청년과 3일에 걸쳐 약 11시간 남짓 시간을 보냈고 말이 많진 않지만 잘 들어주는 청년은 재미는 없지만 사람은 성실하고 착해 보였다. 8월의 마지막 날, 이것은 무슨 우연인지 내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그 날, 내가 입국하는 시간으로부터 얼마 뒤 그 청년은 아일랜드로 돌아갈 예정이었고, 한 시간 정도 되는 그 시간 공항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내가 아일랜드에 가도 되냐고 물었을 때 그는 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20인치 캐리어를 터덜터덜 끌고 집으로 돌아왔고 그는 그대로 비행기를 타고 아일랜드로 돌아갔다. 아일랜드로 돌아간 청년은 하루에 한 마디라도 따박따박 연락이 왔고, 오랜만에 연말 휴가를 몰아 쓸 작정이었던 나는 다른 곳을 제쳐두고 그렇다면 아일랜드로 갈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오라고 했다고 진짜 가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청년과는 주로 문자로 연락을 했지만 내가 원하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전화로 한두 시간 수다를 떨었다. 물론, 거의 내가 열심히 떠든다고 보면 된다. 청년이 아일랜드로 돌아간 지 한 달 정도 됐을까, 수다의 끝에서 내가 물었다. 너 와도 된다고 했지? 나 너한테 가도 돼? Can I come to you? 수화기 너머 짧은 침묵 뒤 당황한 청년은 버벅대기 시작했다. 청년은 빈말도 거짓말도 못하는 성격이라 짐작했었는데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갑자기 나에게 혹시 데이트하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았고 나는 딱히 없다고 대답했다. 당황한 청년은 예전에 잠시 만났던 여자 친구를 다시 만나 데이트를 했다며, 혹시 친구 이상을 원한다면 나는 장거리 연애에는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럼 나도 솔직하게 대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럴 생각은 하나도 없었어 라고 넘길 수도 있었지만 사실 나도 털끝만큼도 그럴 마음이 없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아직 3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았고 그동안 나도 어떻게 될지 너도 어떻게 될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너도 그 친구와 잘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지. 물론 나도 누군가를 만날 수 있어. 하지만 내가 아일랜드를 가야겠다고 결심한 건 네가 헤어질 때 나에게 "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라고 아주 솔직하게 말해줬다. 너의 제안대로 오랜만의 휴가를 "친구"가 있는, 그렇지만 동시에 "좋은 남자"가 있는 곳으로 갈까 생각했던 것이니 이런 나의 생각이 부담스럽다면 너는 거절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다른 목적지를 찾을 수 있고 딱히 너에게 내 여행을 다 맡기지 않을 것이다, 여행을 하다가 잠시 들러서 만나서 얘기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라고 내 의사를 분명히 전달했다.


You are more than welcome.

청년은 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몇 번을 자꾸 얘기하니 환영하는 것 같지 않다. 내 속이 꽈배기처럼 꼬여서 그렇게 들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 한번 정확히 얘기해주었다. 나는 원래 누구와 여행하는 타입도 아닌 데다가 애초부터 너에게 내 여행을 다 맡길 생각은 없다. 그리고 혹시 당신 집의 방 한 칸을 빌리게 되더라도 남은 세 달 동안 너에게 누군가가 생기고 그 친구가 나의 방문을 불편하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네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나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No you can stay with me anytime. 그러지 말라는 나의 말에 지지 않고 청년은 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비행기 표를 사면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고 뭐 청년이 아니더라도 아일랜드를 못 갈 이유는 굳이 없으니 잠시 고민을 마치고 더블린 행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겨울에 뭘 할 수 있는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역시 좋은 시기는 아니군... 눈도 오는데 더럽게 춥고 해도 빨리 지네? 잠시의 검색 뒤, 아일랜드에서도 운이 좋으면 오로라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의 복권 당첨될 확률에 가깝다고 한다...). 그리고 겨울의 황량한 대서양을 볼 것이고... 뭐, 남들이 다 보는 푸른 들판의 아일랜드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가장 먼 서쪽 끝에 있는 그 나라의 황량함이 주는 무언가의 정서가 있지 않을까... 그럼 난 거기서 무엇을 생각하게 될 것인가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Source: BBC https://www.bbc.com/news/uk-northern-ireland-34476274)





환불 불가 티켓을 구매해버렸기 때문에 나는 별 이변이 없는 한 12월 26일 인천에서 더블린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게 될 것이다. 한 번 결심하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저지르고 보는 성격 덕분에 나는 2020년을 아일랜드에서 맞게 될 것이다. 어색함이 넘쳐흐르던 9월의 전화 통화 이후 한 달 반이 지나고, 다행히(?) 청년과는 아직도 하루에 한 번이라도 안부를 주고 받고 소소한 이야기를 하며 연락을 이어오고 있다슬슬 여행 계획을 세워야 할 이 시점, 청년은 아직도 나를 받아줄 생각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는 그럴 작정인 것 같다. 지금까지 서너번 반복하여 물어보았는데 청년은 내가 도착하는 26일에 나를 데리러 더블린으로 올 것이고 (그의 집은 더블린이 아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6일에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줄 것임을 단호하고 분명하게 밝혔다. 그리고 서부 해안을 거쳐 북부까지 가는 내 여행에 운전사 노릇을 할 것이며 그의 도시와 그 주변, 심지어 더블린까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야 말았다. 아무리 성실해도 열흘을 아무 생각없이 내놨을 거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나도 더 이상 물어보지 않고있다. 11시간 동안의 성실함을 덜컥 믿은 나의 무모함과, 자신이 뱉은 말을 위해 연말연시의 10일을 툭 꺼내놓은 청년의 우직함(?)은 어떤 결말로 끝날까. 여행을 마치고 다시는 보지 않을 사이가 될 지, 11시간 인연이 열흘의 여행 메이트가 되고 어쩌면 정말 둘도 없을 친구가 될지도 모를 노릇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2019년 12월 26일부터 2020년 1월 6일까지 11시간 얘기하고 두 달 남짓 매일 문자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청년과 한겨울의 아일랜드를 여행하게 된 이유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세상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러니 빈말로라도 누군가를 함부로 초대하지 말자. 그걸 덥석 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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