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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진 Dec 07. 2021

꼴등의 삶에 일어난 기적..

둥지 잃은 한 마리 새처럼 낯선 거리 한복판에 서있었습니다. 옆구리에 두꺼운 봉투 하나 끼고서, 어딘가 있을 신문사를 찾아 떠돌았습니다. 누런 봉투 위로 집사람이 써준 단정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중앙 장편문학상 응모 작품’ 누군가 먼저 올려놓은 돌탑 같은 응모작 위에 저의 소설을 올려놓았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집사람의 글씨가 그녀의 눈물로 보였습니다. 신문사를 빠져나와 걸었습니다.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집으로 가기 힘들었습니다. 바람에 떠밀려 어디론가 실려가고 싶었습니다.


당차게 회사를 나왔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습니다. 소설이 아니었나 봅니다. 상실감을 감추긴 어려웠습니다. 아쉬웠습니다. 좌절하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자신과 타협했습니다. 천재가 아닌 이상, 단 한 번에 쓸 수 없다고 위로했습니다. 소설의 제목은‘별’이었습니다. 비록 세상의 빛을 보진 못했지만 소중합니다. 까만 하늘 빛나는 별처럼, 저 또한 빛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먼저 불쑥 편지를 드리게 되어 진심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저의 간절함 때문에 부득이 실례를 무릅쓰게 되었네요. 저는 두 권의 책을 출간한 김진이라는 무명작가입니다. 지금은 글쓰기에 대한 강의와 대필 작가로 활동하고 있지요. 대략 십여 년 전 두 권의 장편 소설을 홀로 쓰면서 글쓰기와 질긴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어떤 이끌림에 갑자기 소설을 쓰게 되었는데, 어느새 전업 작가가 되었네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시겠지만, 잠시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서울예술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습니다. 젊은 날 연극이 뭔지도 모른 채, 입학하게 된 학교였지요. 사실 저의 입학은 기적이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죠. 누군가 운명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재능이 일도 없는 사람입니다. 남들보다 잘하는 것 하나 없이 의기소침한 삶을 살아왔지요. 기적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변인처럼 살아온 저의 인생이 한몫 거듭니다. 오십 평생 피라미드 하층에 속해 있었던 나, 다행히도 그 세계에서만은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그동안의 제 삶을 정의하자면 꼴등 중에 일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위권 혹은 주류에서는 어김없이 꼴등이었지만, 소위 말하는 하위권, 비주류에서는 늘 일등을 일삼았지요. 제아무리 노력해도 서울대를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입학할 수 있는 대학도 분명 존재합니다. 누구나 일등을 할 수 있고 아무나 서울대에 갈 수 있다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열의 차이, 열성과 우성을 진작부터 받아들인 저는 많은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물론 그 기적이라는 것이 주어진 현실을 고맙게 받아들이는 것이었지만요.


비록 일등도 주류도 아니었지만 그들의 삶보다 더 멋지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왜냐하면 그 기적을 일으키게끔 한 것이 바로 제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증인이 되고 싶습니다. 꼴등도 일등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누구나 크든 작든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기적이라고 생각하면 기적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기적을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삶을 누구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삶이기 때문이죠.


제가 좋아하는 숫자는 5자와 7자입니다. 유년시절부터 이유 없이 이 숫자가 좋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중간고사를 보고 태어나 처음으로 반 석차가 명기된 성적표를 받아보았는데 공교롭게도 57등이었습니다. 공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최소한 35등은 할 줄 알았는데, 제 예상을 크게 빗나갔습니다. 68명 중에 57등,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 뒤로 11명이나 있었네요. 물론 도토리 키 재기지만 말입니다. 더 이상 나빠지려야 나빠질 수 없는 성적은 중3이 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1987년 그때, 제 인생의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납니다.


중학교 3학년 1학기 말미에 담임 선생님과 고등학교 진학에 대해서 심각한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청담동에서 학교를 다녔기에 강남 8 학군에 속한 고등학교에 입학을 해야만 했는데, 연합고사 점수에 따라 진학을 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한 반에서 대략 열댓 명 정도가 시험에 떨어져 재수를 하거나 야간 고등학교 가야 하는 시절이었지요.

저는 그 당시 짝사랑하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여학생과 뭐라도 만들려면 인문계 고등학교에 무조건 입학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여름 방학 때부터 불철주야 독서실에서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행한 공부였죠. 그동안 단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던 참고서는 새 책과 다름없어 공부하는 맛이 꽤 쏠쏠했습니다. 개학을 하고 나서도 코피를 쏟아가며 중학교 3년 치 공부를 몰아서 해버렸죠. 아는 게 전무했으니까요.


1987 12 유난히 추웠던 겨울 연합 고사를 보고  , 집으로 오는 지하철  의자에서 가채점을 해보았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소리를 질렀죠. "아악,  붙었다!” 마침  옆에 미화원 아주머님이 바닥을 닦고 있었는데, 웃으며 저를 축하해 주셨지요. 제대로  사고를   있다고 생각한 시기에 일어난  번째 기적이 아닐까 합니다. 저보다 석차가 좋았던 같은  학생들까지 대거 떨어졌는데, 저는 당당히 우수한 성적으로 붙고 말았으니까요. 이게 기적이 아니면 뭐가 기적일까요?


저는 영동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고, 성적은 역시나 바닥을 기었지만 그 누구보다 멋지고 행복한 고등학교 생활을 했습니다. 물론 공부는 버릇대로 일도 하지 않았죠. 공부는 꼴등, 노는 데는 일등이라 늘 욕만 먹었지만 참으로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그 결과 당연히 대학도 떨어지고 재수, 삼수 모두 고배를 마시고 입대를 했지만 말입니다.


저의 두 번째 기적은 1993년도부터 1995년도까지, 군생활 중에 일어났습니다. 재수, 삼수를 했지만 연극영화과 진학에 모두 실패하고 고졸인 상태로 입대를 했습니다. 강원도 최전방에서 근무를 했기에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선임들의 구타와 싸워야 했습니다. 전쟁이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꽤 고된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바로 이 군대에서 저의 가능성을 보고 말았습니다.


사회에서는 꼴등이었지만 전국 팔도에서 모인 부대에서만은 일등이었기 때문입니다. 우연찮게 꼴등이 저희 부대에 다 모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는 언제나 일등을 도맡았습니다. 군대에서의 일등은 휴가를 절대적으로 보장했기에 저는 오직 일등만을 노렸습니다. 웅변대회, 저격수 교육, 60 화기 교육, 반공 글짓기 대회 등등 저는 거의 모든 교육 및 대회에 참가하여 일등을 거머쥐곤 했지요. 그때 느낀 큰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꼴등도 노력하면 일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물론 저의 경우 꼴등들이 모인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일이긴 합니다.


저의 세 번째 기적은 1996년도에 일어났는데, 공교롭게도 세 번째 기적 역시 입학에 대한 이야기네요. 원래 기적이란 게 결과가 좌우하니까, 이해해야겠지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대학교 입학은 기적을 넘어선 운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뭐랄까, 제가 노력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죠. 거저먹었다고 할까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저는 1995년 5월 군대를 전역하고 그때부터 학원을 다니며 입시를 준비했습니다. 학력고사가 폐지되고 수능으로 시험 제도가 변해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에 원서를 쓸 수가 있었지요.


연극영화과 아닌 다른 학과 여러 곳에 원서를 넣고 합격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끼도 없고 연기를 해본 적도 없고 해서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을 했지만 저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서울 예술 대학교에 원서를 넣었습니다. 미련만 있었지 어떤 간절함 같은 것도 없었기에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을 치렀는데, 기적인지 운명인지 덜커덕 합격을 하고 말았습니다. 믿기지 않았지만 다행히 꿈은 아니었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커다란 기쁨을 느꼈습니다. 늘 뒤처지고 부족했던 세월을 보상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죠.


대학을 졸업했지만 연기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저는 외국계 음반사에 입사를 했습니다. 음악적인 소질 역시 없었지만 그 누구보다 많은 음악을 섭렵하고 있었기에 음악을 제작하고 유통하는 회사에 지원을 한 것이죠. 꼴등 인생이었지만 순하게 생긴 제 외모와 말소리를 믿었기에 면접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붙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저는 우편이 아니라 회사로 직접 찾아가 이력서를 제출했을 정도로 적극적이었죠.


나이 제한에 걸렸지만 다행히 서류 전형에 합격하고 면접의 기회를 얻어냈습니다. 저를 배려해 주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또한 회사는 지원자 중에 나이가 제일 많았던 저를 일 순위로 뽑아주었습니다. 쟁쟁한 친구들이 많았는데 저의 간절함이 통했을까요? 여기서도 늘 꼴등으로 살아온 제가 또다시 일등이 되고 말았습니다. 꼴등도 일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한 셈이죠. 사실 기적 같은 일은 아니지만 제 논거의 근거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입사를 하고 7개월 후에 저는 스무 살에 처음 만났던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제 몸과 마음을 정신없이 흔들어 놓을 정도로 아름답고 지적인 사람과 말입니다. 이 또한 저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꼴등이 익숙한 남자가 미인을 얻었으니까요. 늘 패배자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왔던 제가 누구보다 먼저 샴페인을 터트리고 말았지요. 거리를 같이 다닐 때면 모두의 시선을 뺏어버리는 그녀, 그 곁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여자였지요. 꼴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그녀가 제 짝이 되었습니다. 이 또한 순위를 매긴다면 일등이 아닐까 합니다. 그녀는 수없이 많은 잘난 남자 중에 저를 선택했으니까요.


저는 3년 정도 음반사를 다니다가 노력하는 만큼 보상이 따라오는 일이 하고 싶어서 전직을 합니다. 2003년도 8월 수입자동차 최초로 공개 구인을 했던 회사에 운 좋게 원서를 넣을 수 있었습니다. 수입자동차 최초였기에 학벌이 좋은 사람들이 꽤 많이 지원을 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중압감과 간절함을 동시 느낀 때이기도 합니다. 저는 혼자가 아니라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죠.


다섯 명을 뽑는 자리, 최종 면접에 저를 포함해 지원자 20명이 있었습니다. 무조건 5등은 해야 했지요. 나 자신을 드러내는 성격이 아닌데, 최종 면접 날을 달랐습니다. 꼭 붙어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에 적극적으로 저를 알리고자 했지요. 그날 저녁 저는 또 한 번 일등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면접관 모두가 저에게 제일 높은 점수를 주었다고 합니다. 기적이었지만 제 간절함이 만들어준 기적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저는 수입자동차를 판매하면서 영업과 사람에 대해 알아갔습니다. 그 당시는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에서 수입자동차는 점유율이 채 1프로도 안 되었기에, 그 수요가 적은 만큼 판매도 어려웠기에 인센티브가 상당히 높았습니다. 열심히 노력을 하면 큰돈을 벌 수가 있었지요. 저는 줄곧 일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일과 돈 모두를 거머쥘 수 있는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들과 딸이 모두 이 시기에 우리 곁으로 왔습니다.


세상이 무서워 결혼 후 5년이 될 때까지 일부러 아기를 갖지 않고자 했는데,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나 봅니다. 피임을 한다고 했는데도 아기가 생겼으니까요. 그것도 하나도 아닌 둘이나 말입니다. 이 역시 기적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다르게 운명적으로 아이들이 와주었으니까요. 그것도 아주 똑똑하고 예쁜 아이들이 말입니다. 아들과 딸 둘을 낳은 것도, 또 예쁘기까지 한 것 역시, 순위를 매긴다면 일등이 아닐까 합니다. 꼴등이 익숙한 아빠에게 세상에서 제일 부자라는 생각을 갖게 했으니까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첫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저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빠가 살아온 길을 남겨놓고 싶었기 때문이죠. 그 당시만 해도 서른여섯 살에 첫아기는 늦었다는 생각이 팽배했었죠. 첫째 아이가 서른이 되면 제 나이는 육십오 살이었습니다. 초조함이 밀려와 저도 모르게 펜을 잡게 된 것이죠. 유년의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과정을 쓰고자 했습니다. 다행히 글은 잘 써졌고, 그 재미에 흠뻑 빠지고 말았습니다. 어렵게 자투리 시간을 내서 썼음에도 불구하고 원고는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썼지만 본격적인 글쓰기의 시작이 아마도 이때가 아닐까 합니다.


저는 2010년도 어떤 계기가 있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3개월 만에 장편소설 초고를 써내고 9개월 동안 퇴고를 했습니다. 이때도 회사 재직 중에 시간을 내서 쓴 것이죠. 사무직이 아니라 영업을 했고, 또 직책이 팀장이라 어렵지 않게 시간을 낼 수 있었습니다. 실적만 받쳐준다면 말입니다. 영업은 실적이 깡패이니까요. 첫 번째 소설을 쓴 지 2년이 넘은 시점인 2013년도 2월에 소설가가 되기 위해 무작정 회사를 나왔습니다. 더 나은 아빠가 되고 싶었고, 좋아하는 글쓰기를 업으로 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시고 작가는커녕 등단도 하지 못했지요. 불투명한 미래, 그리고 실업자 신분인 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작정 카페에서 글을 썼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글을 쓰는 일밖에 없었지요. 그렇게 3개월이 지나고 두 번째 장편소설 초고를 완성했습니다.


소설을 쓰긴 했어도 작가가 아니었기에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저는 하는 수없이 다시 수입자동차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글쓰기에 대한 미련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저는 또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소설이 아니라 써놓은 두 편의 소설을 다듬기 시작한 것이죠. 저는 소설을 쓰면서 글과 글쓰기에 대해서 저절로 알게 되었습니다. 단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다 보니, 글이 보였던 거죠. 소설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지만 저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준 길고 긴 과정이었습니다. 그 과정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할까요?


두 편의 장편 소설은 저에게 첫 번째 책을 출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었습니다. 소설을 쓰면서 알게 된 글쓰기의 비밀을 얘기한 <마흔, 나를 위해 펜을 들다>라는 책을 출간했기 때문이죠. 판매는 많지 않았지만 다시는 쓸 수 없는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인용 문장 하나 없이, 그리고 참고 문헌도 없이 오로지 제 생각에 기대서 완성한 글이니까요. 학창 시절 늘 하위권에서 맴돌던 사람이 300페이지 분량의 책을 썼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도 회사를 다니면서 말입니다. 모방도 아니고 붙여 넣기도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출판사 중에 제 글을 알아봐 준 단 한 곳의 출판사, 이 사실만으로 기적이라 얘기해도 되지 않을까요?


저는 이렇게 첫 번째 책을 내고 작가 아닌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두 번째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첫 책이 나온 지, 일 년 후에 저의 두 번째 책 <관계는 습관이다>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제야 작가가 된 듯했습니다. 마침 회사도 나오게 되어 전업작가가 되고 말았지요. 현재는 지난해 8월부터 실업자와 작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실업자가 더 정확할지는 몰라도 짜깁기 책이 아닌 오직 제 생각만을 담은 책을 두 권이나 낼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이 저에게 가져다준 것은 무엇일까요? 금전적인 보상은 그 노력에 비해 미비했습니다. 하지만 정신적인 보상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컸지요. 항상 돈에 쪼들려도 글쓰기를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직업을 떠나 그것을 뛰어넘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었죠. 제 존재의 이유가 글쓰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두 권의 책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금전적인 보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작가로 살게끔 간접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저는 백화점 문화 센터에서 글쓰기 강의를 합니다. 그리고 책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글을 써주는 일도 하지요. 과연 머리도 안 좋고 꼴등만 일삼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글과 글쓰기 강의를 할 수 있을까요?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가요? 하지만 저는 제 능력 안에서 만들었습니다. 기적인지 운명인지 아니면 제 노력의 결과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다른 인생을 설계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일등도 꼴등이 될 수 있고, 꼴등 역시 일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노는 물이 다를지라도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충분히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증명하고 싶습니다.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새로운 돌파구가 생긴다는 믿음을 말이죠.


제가 기적이라는 말을 언급하게 된 것은, 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피라미드 상위 계층의 사람이든 아니든 그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저에게 일어난 일은 기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기적이라는 사실에 추호의 의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족하게 태어난 저를 끊임없이 괴롭혀왔기 때문이죠.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부족한 내가 싫어 그것을 채우기 위해 남몰래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력의 결과가 아픔이 되기도 했지만 그 노력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웠습니다. 결과가 안 좋을지라도 최소한 후회는 없었으니까요. 간절한 마음은 작든 크든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제가 그 근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에서 편지를 썼는데, 장황하고 긴 글이 되어버렸네요. 너그럽게 이해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1.12.07 김진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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