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다은 May 14. 2019

번외

사실 이 글이 남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 것은 굉장한 유감이다. 왜냐면 이 논문은 철저하게 이박혜경박사님에 대한 애정으로 시작된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박혜경박사님은 꽤 오랜 시간 동안 가족과 연애를 둘러싼 감정들과 과 인간의 행동에 대해 여성학적인 접근과 해석을 해 오신 분이다. 당연히 내가 잘 아는 분은 아니지만, 가족과 돌봄을 공부하면서 또 내가 진짜 결혼이란 것을 하게 되었을 때 박사님의 글을 읽으며 위로를 받기도 하고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그랬다. 처음에 석사과정에 입학했을 무렵에는 돌봄과 기혼여성의 굴레에 꽂혀있던 터라 기혼여성에 대한 박사님의 연구를 읽었고, 그 이후에 결혼과 가족에 대해 궁금한 부분들이 생겨서 검색을 하다 보면 종종 또 박사님의 논문이 나왔다. 그러다가 '여성 정책론'이라는 수업이 개설되었고 박사님께서 강의를 하신다고 해서 방학 내내 기대에 부풀어있었다. 뭐부터 물어봐야 할까? 첫 수업에서 너무 많이 물어보면 똘아이 같지는 않을까? 천천히 물어봐야지 싶었는데 수업을 한 번 하시고는 임용되어 춘천으로 가셨다. 그때 정말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정말 너무 많이 울었는데 문제는 내가 왜 우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이 글을 쓰면서는 왜 우는 걸까? 친구들은 '좋아하는 담임선생님이 전근 가서 우는 초딩'이라고 했다. 근데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은데 또 아닌 것도 같다.


페미니즘은 여성운동과 학문을 아우르는 변화무쌍한 무언가 이기 때문에 굉장히 매력적이면서도 삶을 포함하여 어떤 분야에 적절히 적용하거나 응용하기엔 굉장히 어려운 것 같다. 내가 학제를 넘나들 수 있는 실력을 가진 것은 결코 아닌데, 돌봄과 가족을 다루는 정책을 연구하다 보니 무언가 턱턱 부딪히는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마치 박사님이 그 부분에 대해 명쾌하게 정리해줄 것 같은 이상한 기대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내가 석사 3학 차였기 때문에, 뭐랄까.. 빨리 졸업을 해야 하는데 (5차 학기 내에) 페미니즘이라는 학문을 처음부터 다 다루기엔 시간도 없었고 적당히 박사님의 견해를 바운더리이자 연구 방향으로 삼고 진행하면 될 것 같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쉽게 가고 싶은 마음이었지. 그런데 그런 분이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니까, 앞으로의 연구 방향이라던지 소소한 충돌지점 같은 문제들을 하나하나 내가 직접 해결해야 한다는 버거움과 두려움 그리고 막연한 신세한탄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신세한탄의 마음은 석사논문을 쓰면서 마구마구 서러움 같은 것으로 변해서 꽤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소리 내서 울면 그냥 힘든 감정이 일단 해소되는 기분이 들어서 많이 울었던 것도 같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똘아이 같아 보일 성 싶어 묻지 못한 말들이 너무 많아서 아쉬운 마음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고 또 이런저런 고민들에 대해서 공감해주고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과 결국엔 닿지 못했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울면서 석사논문을 쓰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나에게 닿고 싶은 마음들이 있다고 전해주었다. 글쎄,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싶지은 마음은 여전하지만 또 내가 고민했던 만큼은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석사논문을 어떻게 어떻게 대충 마무리를 하고 박사과정에 입학하게 되었다. 박사과정에 입학해서 여성정책에 관심이 있다는 석사 선생님들과 종종 만나서 논문 방향에 대해 고민을 나누고, 젠더 분석과 성별 분석 같은 사소한 용어들도 정리해나갔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생각나서 논문 포털사이트에 박사님 이름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박사님 논문들이 있을 것 같아 검색해봤는데 생각보다 많아서 하루에 한 개씩 아껴서 읽었다. 제목이나 내용에서도 알 수 있었지만 애정, 연애, 결혼 그리고 가족에 대한 생각이 진짜 많으셨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 물어보지도 못할 질문들이 더 많이 생겨버렸다.



오늘은 19년 3월 26일.

그동안 나는 참지 못하고 박사님께 팬심을 담아 메일을 보냈다. 사실 오늘도 메일을 보내고 싶은 날인데, 그동안 너무 여러 번 메일을 보내 귀찮게 해 드렸기 때문에 오늘은 메일을 보내지 못할 것 같아 브런치를 열었더니 이런 글이 있었다. 웃기지만 아마도 지난해 서론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만든 여러 버전 중 하나인 것 같다. 


가끔, 이런 날이 있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날이 있다. 아마 박사님께 처음 메일을 드린 날도 그런 날이었다. 내가 여기 있고 당신이 거기 있는 것을 안다는 말을 하고 싶은 날이었다. 그러다가 논문지도를 받던 중에 "편협하다."는 평을 받은 뒤, 나도 모르게 어떤 무언가를 토해내듯이 울면서 "박사님도 제가 편협한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물었다. 아마 첫 메일보다 더 당황하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근데 나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내가 하는 말이 정말 편협한 지, 페미니즘에 매몰된 생각인지 누구에게 묻고 싶었다. 내 논문이 그렇게 화려한 주제도 아닌데 그렇게도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친구들이 하는 말은 그저 나를 위로해주는 말이라 신뢰하지 않는 탓일까? 내가 외곬인 탓일까? 가끔 이렇게 누군가에게 이것저것 묻고 싶은 날이 있다. 


그래. 더 솔직해지자. 나에게 그런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 이것저것 물어볼 사람이 있었다. 대학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선배'라는 존재가 나에게 생겼고, 나는 그를 꽤 따랐던 것 같다. 수줍어하는 성격도 좋았고 말수가 적은 것도 좋았고 나와 관심분야가 비슷해서 방학마다 스터디를 하는 것도 좋았다. 그 역시 그를 따르는 나를 꽤 챙겨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처음으로 나의 질문이 대상을 향했던 순간이기도 하고, 꽤 괜찮은 답으로 돌아오는 순간들이었다. 힘든 일이 생겨도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물어볼 사람'이 있었던 때였다. 같이 수업을 듣고, 흔쾌히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대답을 해주는 사람. 나에게 그런 사람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박사님이 학교를 떠나셨을 때는 굉장히 많이 울었는데, 아이러니하게 막상 선배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별로 울지 않았다. 그냥 덤덤하게 지냈는데, 가끔씩 이렇게 누군가에게 질문을 하고 싶을 때마다 선배가 보고 싶어서 이렇게 운다. 한 번에 우는 것과 나눠서 우는 것의 차이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3.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