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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은 Feb 02. 2021

오늘은 그냥 브런치에 글이 쓰고 싶어서.. 쓰는 글.

소제목은 <이혼 고백서>이고, 탈고는 하고 싶지 않아요.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글을 쓴 날이 언제고, 그 날짜가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친밀함의 영역과 정책의 상한>이라는 이상한 테마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스스로 박사논문 주제로 생각하기 때문에 메모도 여전히 많이 하고 있고, 친밀함에 대한 책을 사모으고 또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대략 2년쯤 지난 것 같다. 아무래도 박사과정을 입학하면서 브런치를 시작했던 기억이 나기 때문에, 대충 브런치의 시작을 18년도로 하면.. 아마도 글이 멈춘 것이 19년 쯔음. 그리고 작년은 온전히 제주에서 쉬면서 지냈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는 2021년이기 때문에.. 그렇게 유추해볼 수 있을 것 같다.


19년도에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피해와 가해의 스펙트럼 안에서 나를 가해의 스펙트럼에 있다고 누군가가 ‘신고’를 했기 때문에 나는 학내 인권센터의 조사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런 일에 대해서 “네가 결백하면 결백한 거지! 왜 스트레스받아?”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동안 앓고 있던 모든 병들이 그때를 기점으로 폭발해 버리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뭐랄까. 그때 왜 그랬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저 우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학기말인가 연말쯔음에 인권센터에서 “가해의 스펙트럼에 있지 아니함.”이라는 조사 결과서를 발표하였고, 또 센터장님 외 교수님들이 따로 면담을 요청하여 “네가 가해의 스펙트럼 내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너무 힘들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위로를 전하셨지만, 나의 마음은 눈물로 가득 차 버린 뒤라 그 어떤 말도 소용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울고, 또 울고 담배를 피우고, 또 피는  날들이 계속되었고 내 병은 계속 계속 자라나서 ‘나’라는 사람을 그저 삼켜버린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내 병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 주변 지인들이 나에게 미국 여행을 권했고 미국에서 마약중독자들을 케어하는 커뮤니티 케어 시스템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 것 보다도 더 길고 긴 고속도로 행렬 속에서 나는 내 인생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처음으로 꺼내어 읽어보았다. 이제는 희미한 기억이지만, 차 안에서 어떤 얘기들을 오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고 또 구태여 질문하지 않고 혼자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었던 동행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무튼 나는 많은 생각들을 했는데, 깊어지는 우울 탓인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혼을 하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남편에게 미국 여행에서 포기한 줄로만 알았던 유학의 꿈같은 것이 올라왔다고 말하자. 남편은 2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럴 줄 알았던 대화의 전개라서 특별히 개의치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난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은 것 같아. 결혼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갖고 싶지 않을 것 같아. 언제든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하면서 살고 싶어. 만약, 당신이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면 나는 당신을 놓아주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내가 이혼을 해주는 것이 맞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그게 아마도 19년 8월 16일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그 어떤 이유에서든지 최고로 극심한 우울에 시간을 지나고 있던 것 같다. 혹여나 오해할까 봐 말하자면 학내의 일로 이렇게 된 것은 아니라는 말을 구태여 덧붙이고 싶다. 깊은 우울의 늪에서 내가 허우적거렸던 시간들 속에서 인생의 어떤 큰 결정을 한 것이 경솔하지는 않았는지 끊임없이 반추하고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고, 학내의 일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긴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만, 그 얘기를 초반에 언급한 것은 ‘갑작스럽게 터져버린 나의 우울’에 남편이 많이 힘들어했고, 그동안 경증으로 보이던 나의 우울증이 중증이라는 현실을 대면했을 때 나의 남편은 한 발 뒤로 물러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다 내 주관적인 기분이고 기억이다. 그렇지만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 내가 앓고 있는 질환에 대하여 가벼이 여기던 남편은 “2세를 낳아야 한다.”라는 새로운 목표를 두고 나의 회복을, 나의 완치 계획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운동을 해라, 밥을 먹어라, 슬프다고 생각하지 마라. 등등의 말들 속에서 나는 일단은 나를 먼저 보호하고 싶었고, 또 나 역시 내가 건강해지기를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기에 남편의 완치 계획에서 벗어나 온전히 홀로 제주도에서 한 달을 지내보기로 하였다. 당시의 나는 이상하게 이런 생각에 매몰되어있었는데, 결혼 전에는 엄마 아빠 돈으로 생활하고 결혼 후에는 남편 돈으로 생활하는 내가 마치 기생충 같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2019년 한 해동안 프로젝트 등으로 번 돈으로 제주도에서 1달여 기간을 혼자 살아보고자 했다. 내 돈 내산. “내 돈으로 내가 산다.”같은 마인드로 제주로 내려갔다. 엄밀히 따지자면, 내 차로 이동한 것이 아니니 온전한 “내 돈 내산”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서귀포 토평동 원룸에 도착하여 숑이를  들이고, 쓰레기통 등을 만들면서 나름의 정리를 한 시간들이 너무도 행복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나는 메추리알이나, 구좌 당근이나, 오트밀, 요거트로 허기를 달랬고,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마트 할인 시간에 일부러 방문하여 30% 이상 할인된 등심을 사다가 구워서 숑이랑 둘이 나눠먹곤 했다. 우울증 약을 복용하면서 쪘던 9킬로의 몸무게를 전부 다 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몸이 가벼워지는 것도 느꼈고, 매일 숑이와 함께 근처 오름이나 올레길을 걸은 것도 너무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코로나가 20년 2월께부터 심각해지기 시작하였고 내가 3월에 제주도에 갔으니, 꽤 운이 좋은 셈이었다. 마스크는 당연히 쓰고 다녔지만, 올레길이나 오름에서 2m 정도의 거리두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고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심리적으로도 외출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다 보니 제주에서 1년 정도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느 날 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채용공고에 바로 응시하여 4월부터는 제주도의 모연구원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여러모로 좋았던 것은 똑같은 월 단위 계약직 연구보조원이긴 하나, 8개월 계약이므로 계약 만료 후 실업급여 신청이 가능하다는 점이었고 또, 제주도 최저생활임금 적용에 의해 세전 205만 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채용 결정이 나자마자, 나는 숑이와 함께 살 수 있는 (직장 근처에 위치한) 집을 알아봐야 했다. 한 달 살이를 했던 곳은 서귀포라서 꽤 위험한 516 도로로 출퇴근을 해야 했고, 차량 유지비가 추가되는 생활비를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남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독단적으로 내가 결정한 일이라 당시엔 남편도 화가 많이 났었고, 또 부모님들은 부부관계의 이상 징후라고 여기셔서 가족들의 걱정 어린 잔소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가진 돈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그때, 왜 그랬는지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살아보고 싶었다.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독립해서 살아보고 싶었다. 그냥 그 마음이 너무 강했던 것 같다. 제주도는 보통 ‘연세’를 기준으로 임대를 하기 때문에, 강아지와 함께하는 8개월짜리 단기 월세방은 꽤 찾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이 많은 집 들 중에 내 집이 없다니..”라면서 옥상에서 찔끔 울기도 했는데, 그런 눈물 속에서 이상하게 몇 가지 단단한 것들이 내 마음에 남게 되었다. 일단, 숑이와 떨어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으니 차량 유지비를 감당하고서라도 당시 살던 집에 계속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욱더 숑이와 떨어져서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학교일로 인해 숑이를 일주일에 한 번 보는 것도 나에겐 너무 힘들었고, 내가 울 때마다 쓰다듬을 털북숭이가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그때는 내가 제주도에서 생을 마감할 것 같은 공포가 늘 내 안에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이 숑이는 나에게 타협할 수 없는 존재였다. 여기저기 부동산들과의 연락을 통해, 드디어 20분 정도 걸어서 출퇴근을 할 수 있는 거리에 숑이와 함께할 수 있는 원룸이 나타났고 점심시간에 바로 계약을 해버렸다. 그리고 비가 억수로 많이 오던 어느 날, 나는 서귀포에서 제주시로 숑이와 함께 이사를 했다.


정말 너무너무너무너무! 행복했다. 남편이 차 없이 살기엔 너무 힘들다고 하여 2-3일 뒤에 탁송 서비스로 차를 올려줘야 했기에, 이사한 당일에 마트와 다이소를 가서 이것저것 필요한 물품들을 샀는데 그러다가 주차장 기둥에 문을 박았.. 아니, 지졌다고 해야 하나? 지긋이~ 지져서 눌러버리는 그런 일이 생겼다. 나는 차 안에서 소리 지르면서 울어버렸고, 또 난데없이 남편을 탓하기 시작했다. 청주, 아니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청주시내 말고 오송과 오창에서의 삶에서 차 없이 지내는 것은 상당히 불편한 일이다. 마치 “발이 묶인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서울 지하철이 닿는 곳 외에는 거의 모든 지역이 그럴 것 같기도 한데, 결혼생활 내내 그 불편함을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하던 남편이었다. 그 불편함을 본인이 직접 겪어야만 알아주는 남편이 너무 미웠던 것 같다. 제주에서도 차가 있어야 숑이랑 어디 갈 수 있는데 출퇴근을 도보로 할 수 있으니 차를 올려달라는 말에 너무 섭섭했던 것도 같고 탁송 일정에 맞춰 급하게 장을 보다가 이런 일이 생긴 것 같아 그냥 소리 지르면서 울어버린 것 같다. 한참을 울다 보니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겨우 차를 빼서 집에 돌아왔고, 천 원 이천 원을 아끼려고 다이소에 갔다가 문을 박은 것이 어이없고 허탈하여 자꾸 웃음만 나왔다. 여하튼 차를 올리고, 문 복원비용 200만 원을 지출하고 나니 이제야 제주에서 살고 있다는 현실감이 팍팍 느껴졌다. 그리고 8개월 동안 정말 재밌고 행복한 “제주 워홀”을 보내고 청주로 돌아왔을 때, 나와 남편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걷고 있음을 깨달았고 함께 법원에 가서 이혼조정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결혼 전부터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남편을 만나 페미니즘을 안 뒤부터) 나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고, 또 그런 나의 의사를 늘 존중해줄 뿐만 아니라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몸과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여자가 판단할 일이지 남자가 운운할 일이 아니지.”라고 큰소리치던 내 남편이 너무 고맙고 또 자랑스럽고 뿌듯하고 그랬었다. 그래서 나의 병세와 상관없이 2세를 외치는 남편을 보면서 “이건 사기결혼이야!!!” 이렇게 부들부들 떨 던 시간들도 있었고, 또 그동안 배웠던 페미니즘 이론을 발판 삼아 아주 아주 독하고 거친 말들만 일부러 뱉어낸 적도 있었다. 또 남편 역시 나에게 상처가 될 말들만 했던 시간들도 있었고 또 전화나 톡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제주로 내려와서 2차전을 하기도 했다. 근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람의 마음이란 게 변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싶다. 당근을 싫어해서 모든 김밥에서 당근을 빼고 먹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당근케이크에 빠져서 당근주스까지 매일 마시게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또 너무도 많은 일들이 있어서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사기결혼이니 페미니즘에 빠져 이기적인년이 되었느니 하는 말들이 무색하게 그냥 시간이 흘러서 또 시간에 따라 우리는 우리의 방향대로 자라난 것뿐이다. 그런데,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남편과 나는 약 8년이란 시간 동안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어서 이 싸움의 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남들은 같이 한 이불 덮고 자면서 손이 닿아서 풀렸다고 하기도 하고, 또 그냥 밥 먹는 모습을 보면서 혹은 출근하는 뒷모습이 애잔해서 등등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화해를 하는 것 같았는데 우리는 도통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내가 제주에서 살았던 시간은 법적으로 별거기간에 속하는데, 그 시간 동안 한 달에 한번 꼴로 제주에 왔던 남편과 그를 맞이 하는 나는 그저 파도가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서핑 매이트 같은 느낌이었고 무엇보다 남편은 제주여행에서 숙박비가 들지 않는 게 너무 좋다고 했을 뿐 특별한 무언가는 없었다. 그런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각자가 원하는 행복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고, 나는 사람 아이가 없고, 숑이와 함께하는 삶을 주된 조건으로 삼게 되었으며 남편은 아이가 있는 삶을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남편이 2세를 포기하고 나에게 다시 오겠거니 하며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았고, 남편 역시 내가 고집을 꺾고 돌아오겠거니 하면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았다. 그리고 1월 21일. 이혼신고를 마쳤다. 이혼신고를 하러 가면서도 우린 한 달만에 만나서 꽤 즐거웠기 때문에 혹 누군가의 눈에는 위장이혼처럼 보였을 것 같기도 하지만 우린 타협도 화해도 잘 모르는 채로 그렇게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지금 울고 있지만, 사실 남편과 다시 잘해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또, 누군가의 말처럼 이혼으로 끝나버린 이 결혼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나는 내 남편의 아내이고 싶었고 또 결혼이란 걸 하고 싶어 20대 내내 열심히 그리고 또 부지런히 남편감을 고르던 사람이었으며 가능하다면 서른 전에 결혼하고 싶었던 사람이니까. 후회할 일은 전혀 없다. 지금의 슬픔이 곧 후회를 뜻하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이혼도 꽤 가볍게 생각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잦았던 부모님들의 싸움을 보면서 “저렇게 안 맞으면 이혼하지 왜 굳이 괴롭게 같이 살까?”라는 생각을 수 없이 많이 했기 때문에 이혼에 대해서 큰 거부감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혼을 하고 나서 보니까, 그렇게까지 가벼운 일도 아닌 듯하다. 너무도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는 일. 그리고 그 사람과의 헤어짐 속에서 나의 우울증이 영향이 없다고 말하기엔 애매한 일이라서 솔직히 내 탓같기도 한 마음도 많고 또 내가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사람이었다면 남편도 저렇게 지쳐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도 솔직히 있다. 또 결혼에 이어 이혼 역시 우리가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라는 것도 둘 다 충분히 알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나는 남편이 나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라고 하고 싶지 않고, 또 남편 역시 본인 때문에 하고 싶은 일들을 미루며 살지 말라는 뜻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남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만 주었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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