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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루 May 18. 2021

북부가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건 정말 인권 때문이었을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는 세 가지 감상평

1.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유명한 대사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의 소설 속 원문은 ‘내일은 또 다른 날(Tomorrow is another day)’이다.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지만 시간이 뭔지 생각해보면 대답하기가 어렵다. 시간이라는 이 어려운 주제에 대한 강렬하면서도 함축적인, 깊이 있는 주제가 책(영화) 속에 반복해서 등장한다.      

애슐리가 남북 전쟁 전의 남부를 그리워하며 좋았던 날들이 (아마도 바람과 함께) 전부 사라져버렸다고 탄식할 때마다 스칼렛은 반복해서 말한다. ‘뒤돌아보지 마세요 애슐리. 과거의 기억이 당신을 삼켜버릴 거예요’      

유명한 마지막 장면에서, 평생의 사랑이자 세 번째 남편이 떠나버린 직후에도 스칼렛은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새로운 날’이라며 무너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어차피 애써 떠올리지 않는 한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실체가 없고 과거에 일어난 사건과 그 시간들은 흘러가버려 지금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인드 컨트롤이 쉽게 되는 건 아니다. 참을 수 없는 배고픔 때문에 익지도 않은 무를 뽑아먹으면서 다시는 운명에 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스칼렛의 태도를 사람들은 동경하지만, 막상 시련이 닥쳐오면 스칼렛이 아니라 신경쇠약에 걸려 몰락해가는 블랜치(비비언 리의 또 다른 아카데미 수상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여주인공)로 살아가게 된다. 내일이 또 새로운 날이라 해도 그렇게 마음 먹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거나 과거에 겪었던 상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거나 앞으로 그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내일이 새로운 날이라는 건 그 새로운 날에도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무엇을 예측하든 100%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100%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내일이 새로운 날이라는 것만큼은 역설적이게도 100% 사실이다.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시간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이 대사야말로 인생의 진리에 가장 가까운 좌우명이라고 생각한다.         


 

2. 래디컬 페미니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영화로만 본 사람들은 원작 소설의 대놓고 노골적인 페미니즘적 묘사를 보면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냐면 스칼렛의 어머니 엘렌은 ‘이 세상은 남자들의 세계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남자는 손가락에 가시가 찔려도 황소처럼 신음하지만 여자는 출산할 때조차도 남자에게 방해가 될까봐 신음소리를 참는 것이며’ ‘남자는 난폭하고 곧잘 술에 엉망으로 취하며 여자는 아무리 심한 말을 들어도 못 들은 척하고 불평도 않고 주정뱅이를 침대로 데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는 예절을 모르고 마음먹은 대로 내뱉어도 되지만 여자는 항상 친절하고 너그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되어 있다. 1024 페이지나 되는 본문의 중간중간에 잊을만하면 갖가지 주제를 아우르는 과격한(?) 페미니즘적 견해가 툭툭 튀어나온다.      


가령 남자들은 똑똑한 여자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멍청한 여자를 본능적으로 더 좋아한다면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 받는다(작중에 묘사된 남자들은 실제로 스칼렛의 교태에 맥을 못 추지만 레트 버틀러만큼은 그런 가식적인 아양은 극혐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다). 아래는 유모 마미가 그 유명한 스칼렛의 17인치 개미허리를 코르셋으로 조이던 바로 그 날의 대화다.     


"남편을 손에 넣기 위해 왜 여자는 이따위 어리석은 짓을 해야 하지?" 

"서방님들은 어떤 여자가 자기한테 좋은 여자인지 모르기 때문이죠. 알고 있는 것처럼 우쭐거리고 있을 뿐이지. 그러니 그 우쭐해하는 마음만 충족시켜준다면 일은 쉽답니다. 팔다 남은 것 같은 비참한 꼴은 당하지 않게 되죠. 어쨌든 서방님들은 새 만큼 밖에 먹지 않고 조금도 영리하지 않은 아가씨를 좋아하는 법이죠. 상대편이 자기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면 서방님들은 절대로 결혼하려고 하지 않는답니다."

"결혼하고 나서 아내가 똑똑하다는 걸 알면 놀라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할 수 없어요. 결혼한 다음엔 때가 늦은걸요."

"언제고 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할 거야. 남이 뭐라든.“     

(...)      

“양키 처녀들은 이따위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거야. 작년에 사러토거에 갔을 때 봤지만, 남자 앞에서도 모두들 훌륭한 식견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던걸."     

(...)     

"그런 양키 남자들은 돈 때문에 결혼하는 거랍니다."     


또 다른 페이지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어린애처럼 순진한 얼굴로 위장하여 어찌하면 남자들에게 눈치 채이지 않고 그 날카로운 두뇌의 활동을 감출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을 배운 것이다.' (...) 왜 남자란 그런 것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그러한 방법이 가장 효과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이건 수학의 공식 같은 것으로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수학은 그녀가 학교 다닐 때 가장 손쉽게 획득한 과목 중 하나였다.’      


그런데 스칼렛이 사랑하는 유일한 남자 애슐리는 스칼렛 대신 멜라니를 택한다. 스칼렛은 애슐리와 멜라니가 나누는 대화를 몰래 엿듣다가 쇼크를 먹은 나머지 bluestocking! 이라는 탄식을 내뱉는다. bluestocking은 아는 척하는 여자 내지는 문학소녀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스칼렛은 그때만 해도 저 둘이 결혼할 사이라는 걸 몰랐고, 멜라니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모르는 하수라며 속으로 비웃는다. 똑똑한 척하는 건 남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건데…     


앞에 나온 것처럼, 스칼렛은 학교 다닐 때 과목 중에서 수학을 제일 잘했는데 당시 여자가 수학을 잘 한다는 건 매우 여자답지 못하고 부적절한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또, 당시에는 여자가 사업을 운영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스칼렛은 직접 제재소를 운영하는 바람에 이웃들의 엄청난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된다. 두 번째 남편 프랭크보다 훨씬 셈에 밝았던 스칼렛은 각종 수식을 들어 이건 이렇게 해야 이득이고 저건 저렇게 해야 이득이라고 설명하고 싶어하지만 여자가 사업 수완이 좋아서 돈을 잘 버는 것도 모자라서 수학 공식까지 들먹였다간 매장 당할 게 뻔해서 꾹 참는 장면도 나온다.               



3. 북부는 왜 전쟁을 일으키고 흑인 노예를 해방시켰을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철저하게 남부의 입장에서 쓴 책이고 노예제도를 폐지시킨 북부는 타락한 적으로 묘사해서 출판 당시에도 인종 차별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이에 대해 저자인 마가렛 미첼은 그런 의도로 책을 쓴 게 아니며 흑인들은 좋은 사람들이라고 항변했지만 그것만으로 비난을 씻어내기에는 책의 내용이 지나치게 보수적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 책이 단편적으로 남부와 북부 중 어느 한 쪽을 지지한다기보다는, 전에 다른 소설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남부와 북부의 장단점을 깊게 파고든 부분이 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스칼렛은 북부에서 이주한 사람들과 교제하기 시작한다. 다른 남부인들은 북부 사람들(양키들)이라면 치를 떨고 있었고, 이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변절자 내지는 배신자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스칼렛은 사업을 위해 북부 사람들과 인맥을 쌓으려고 아부도 하고, 비위도 맞춘다. 어느 날 북부 메인주 출신의 어떤 여자(아마도 북부를 대표하는 인물)가 새 보모를 구하고 있다고 하자 스칼렛은 자기가 좋은 흑인 보모를 구해줄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자 이 북부 여자는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며 흑인 따위는 신뢰할 수 없다고 질색을 한다. 스칼렛은 놀라서 흑인을 해방시킨 건 당신들이 아니냐고 묻는다. 왜냐하면 스칼렛은 작중에서 남부를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흑인을 훨씬 더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흑인들을 훨씬 더 신뢰하고 있었다. 흑인에게는 아무리 고생을 시켜도 배반할 줄 모르고, 돈으로 살 수 없는 충실함과 인내심과 애정의 미점이 있었다. 스칼렛은 엘렌과 자기와 웨이드를 섬기느라 거칠대로 거칠어진, 다정하고 마디가 굵은 마미의 손을 생각했다. 이런 타관내기들이 어떻게 흑인의 손 같은 걸 알겠는가. 그것이 얼마나 상냥하고 얼마나 위안이 되며 얼마나 적당히 어루만져주고 토닥거려주고 얼러주고 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지 이 따위 것들을 알 리가 있겠는가.'


(...)      


‘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저들은 흑인들을 해방시켰지만 흑인을 좋아하지도 않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물론 모든 북부 사람들이 흑인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레트 버틀러라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인권은 명분일 뿐이고 농업 위주의 남부에 비해 공업이 크게 발달한 북부는 값싼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해졌기 때문이라고. 보통 노예제도를 폐지시킨 북부는 선, 남부는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하지만 북부 사람들의 그런 선택이 사실은 이권을 위해 흑인을 이용한 것이라면? 실제로 몇 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노예 해방 이후 사회적 안전망 부족과 인종 차별로 야기된 흑인 빈곤과 범죄 문제는 미국 사회의 골칫거리가 되었다(여기서 진짜 인종차별주의자들은 흑인들은 천성적으로 나태하고 폭력적이며 지능이 낮기 때문에 빈곤하고 범죄율도 높다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놀랍게도 인접한 캐나다에서는 흑인이 백인에 비해 특별히 더 빈곤하거나 범죄율이 높지 않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아마도 캐나다의 사회복지제도 때문인 듯하다).     

이 주제가 흥미로운 이유는 북부와 남부의 대립이 마치 우리나라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실제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도시와 농촌 간 차이). 스칼렛의 의식 구조를 들여다보면 철저하게 흑인들을 자기보다 낮은 계급으로 취급하면서도 의식주 해결 부분을 포함해서 같이 가는 식구처럼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종의 패밀리 개념인데 북부는 이미 고도로 산업화되어 돈을 못 벌면 굶주릴 수밖에 없는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에 비해 남부 사람들은 공동체 간의 결속력이 아직까지 강해서 누군가 굶고 있으면 이웃 중의 누군가가 도와준다. 실제 스칼렛은 일가친척들뿐 아니라 뒤에서 욕하고 수군거리는 이웃들까지(비록 관습이라 마지못해서긴 하지만) 꾸준히 지원하고, 다른 이웃들도 그와 같이 행동한다. 다시 말해서 북부 사람들은 보다 똑똑하고, 실용적이며, 인권의식과 시민의식도 월등하지만 도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계산적이고 약삭빠르며 이득을 위해 겉과 속이 다른 행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반면 남부 사람들은 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직도 자기들이 최고라는 아집에 사로잡힌 곰처럼 어리석고 미련한 구시대의 유물 정도로 희화화되어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고 보수적이지만 우리나라 말로 하면 일종의 정이라고도 부르는 인간미, 약자에게는 그만큼의 편의와 배려를 제공하는 책임감을 보인다. 가령 남부 신사들은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주체라기보다 일종의 보호 대상으로 간주하는 기사도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스칼렛은 이 기사도를 이용해먹으면서 사업가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남부에서는 부인이 신사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신사가 부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인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구나 용납되지 않았다. 다른 재목상들은 고작 속으로만 분통을 터뜨리고 가족들이 있는 데서나 분개하는 정도로, 아쉬운대로 5분만이라도 좋으니 케네디 부인(스칼렛)이 남자가 되어주었으면 하고 억울해했다.‘      


스칼렛은 제재소를 차린 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사들을 제치기 시작한다. 자기만 빼고는 모든 동종업계 사업주들이 남자지만, 남부 신사들은 약한 여자에게 남자와 같은 기준을 적용해서도 안 되고 좀 더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칼렛이 아무리 부당한 짓을 해도 항의조차 못하고 속만 끓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남부는 가부장적이지만 그만큼 많은 책임을 지는 입장을 보이고 북부는 여성 해방을 내세우듯 흑인 해방을 내세운다. 북부 사람들은 남자들과 동등한 입장으로 여자를 대우해주는 대신 그만큼 기존의 무거운 책임을 벗어버리고 약자들에게도 스스로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      


레트 버틀러는 남부 사람이면서도 자기가 속한 사회의 어리석음을 조롱할 수 있을 만큼 통찰력이 있고 명석한 인물이다. 동시에 자신은 의리나 명분에 얽매이지 않으며 오로지 이익만을 추구할 뿐임을 강조한다. 심지어 그는 스칼렛 역시 자기밖에 모르는 못된 인간이며, 자기와 같은 부류라고 말한다. 비록 이기적이기는 하나 이들은 남부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낭만적인 환상 따위를 품고 있지 않다. 그런 이유로 다른 남부사람들이 몰락할 때도 계속해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남북 전쟁이 끝난 뒤 애슐리는 자꾸만 뭔가가 사라져버렸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말 그대로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린 거다. 뭐가 사라진 건지 끝끝내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지만 애슐리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남부 특유의 실리보다 명예를 추구하는 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로서 정신적 자산과 고결함 같은 것들이 사라져버렸다는 뜻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거기에는 동시에 현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봉건적인 노예제, 구습과 악습이 존재한다. 반면 북부는 약자들, 즉 흑인들과 여성들이 스스로 원하는 사람에게 투표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했다. 더 이상 2등 시민으로 무시당하지 않고 백인 남성과 똑같은 대접을 받는 같은 인류로서, 스스로 원하는 직업을 찾고 가족을 꾸릴 선택권을 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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