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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돈균 Jan 21. 2019

해가 바뀌는 날

12월 31일과 1월 1일 사이

‘마지막 날’은 가장 길고 가장 짧다

책상 위 탁상달력은 한 장만 남았다. 넘어간 지난 달 달력을 들춰 본다. 빼곡히 적힌 메모들을 살핀다. 깨알 같은 메모들은 사건의 가지 수들이다. 달력에 적힌 일 년의 메모들을 떠올리니 접었던 병풍을 펼치듯 시간은 사건의 가지 수만큼이나 늘어난다. 납작했던 기억의 집은 일순간 수많은 방들로 나뉘 입체화 된다. 달력의 메모는 사건의 방들을 기억하며, 그 기억은 시간이 기계적이거나 정량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며 무한히 줄어들거나 늘어날 수 있는 신기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12월의 달력을 보라. 그리고 넘어간 이전의 달력을 들춰보라. 동일한 숫자들이 찍혀 있으나 그 숫자들에 새겨진 사건의 개수와 체험의 깊이에 따라 당신이 산 ‘올해’라는 시간은 구부러졌다 펴졌다 하지 않는가.


12월의 달력을 보며 우리는 이상한 경험을 한다. 그 메모들을 보며 ‘나는 올해 바쁘게 살았구나’ 하면서도 정작 쌓인 것, 이룬 것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여러 사건들의 기억은 있으나 시간은 축적되기보다는 덧없이 흘러가버리는 허무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사건-기억은 덧셈이지만, 시간은 저장되지 않고 어딘가로 빠져나가는 뺄셈으로 체험된다.


‘12월 31일’ ‘한해’라는 기억의 저장소를 열어젖히며 사건들을 펼쳐보는 파노라마적인 날이다. '마지막 날(end of days)'의 파노라마는 드라마틱 하다. 365일의 갖가지 사건-기억이 투사되는 영사기가 그날 하루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이 영사기는 개인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포털에서 종일 올해의 사건-기억 영사기가 돌아간다. 12월 31일의 24시간은 365일을 품고 있다. 365일의 세계를 펼쳐낸다. ‘12월 31일’은 수많은 하루들 중 하루가 아니다. 보르헤스 소설에 나오는 세계 전부를 담고 있는 구슬 ‘알렙’을 닮았다.

 


‘12월 31일’의 특성은 ‘마지막 날’이라는 성격에서 나온다. 그것은 흡사 살아있는 개인들이 아직은 겪지 않았을 임종의 유사체험이다. 거의 죽었다가 기사회생한 이들의 공통적인 증언에 따르면,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당사자에게 임종의 찰나는 한 개인의 모든 인생사를 압축한 것으로 경험된다고 한다. 아주 짧은 몇 초가 인생의 수천수만 가지 기억들을 품고 있다.  그런 증언들이 허튼 소리가 아님을 우리는 12월 31일의 시간 경험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는 ‘마지막 날’, 즉 ‘죽음’ 있음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다. 생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죽음 인식, 내일도 없고 그 다음 시간도 없다는 실존인식이 우리에게 놀라운 기억의 확장성을 부여한다.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 대한 시간의식, 죽음이라는 ‘없는 시간’이 ‘있던 시간’을 모으고 확장시킨다. 12월 31일은 실수를 가능하게 하는 허수, 자연수를 가능하게 하는 0처럼 존재하는 패러독스의 시간이다. ‘죽음의 하루’가 나머지 364일을 담아내펼쳐낸다.


그래서 이 하루 우리는 두 가지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12월 31일은 모든 하루 중 가장 길고 깊다는 것. 하지만 다시 그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소멸의 시간 앞에서 덧없음을 체험하게 하는 이 하루는 일 년 중 심리적으로 가장 짧은 날이라는 사실 말이다.    
     


다시 시작되는 마술

그러나 생의 임종 시간과는 달리 12월 31일에 직면한 우리에게는 마법 같은 일이 남아 있다. 달력을 통해 새로운 시간이 생겨난다. 모래시계처럼 조마조마하게 얼마 안 남았던 것 같은 시간이 새 달력을 통해 마법처럼 재생된다. 달력의 ‘1월 1일’은 1년을 저장하는 동시에 무화시켰던 12월 31일을 완전히 다른 시간으로 바꿔 놓는다. 화수분에서 솟아난 것처럼 시간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물론 이런 시간 마법은 1월 1일에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시계침은 24시간을 돌아 정확히 다시 새로운 시간을 재생하지 않는가. 


낮밤이 바뀌면 다시 새로운 하루가 생겨나고, 하루가 일곱 번 모이면 다시 한 주일이 생겨나고, 하루가 30일 모이면 새로운 달이 시작된다. 1월 1일은 모든 재생적 시간의 끝판왕이다. 덕분에 인간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갖게 된다. 인간은 지구의 모든 유기물과 무기물을 통털어서 시간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1월 1일이라는 달력의 기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과거는 지나갔지만 시간은 달력 속에서 다시 돌아온다. 달력은 시간의 영원회귀를 가능하게 하는 마술책이다. 1월 1일은 시간의 영원회귀를 우리에게 확인시키는 하루다. 모든 질서는 무질서로 돌아가며, 생명은 무생명으로 사라진다는 우주적 엔트로피를 극복하는 마술이 일어난다. 달력의 1월 1일은 12월 31일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다른 벡터를 통해 시간의 압축성을 공유한다. 모든 달력의 1월 1일은 아직 당도하지 않은 365일을 예비하니 말이다. 과거를 압축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기대와 설렘을 압축한다. 우리에게는 실망과 불안과 허무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삶을 기획할 기회가 생긴다.


이러한 시간의 재출발은 ‘세계’의 시작과 깊은 관련이 있다. 종교학자 엘리아데에 따르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한해(year)’라는 말과 ‘세계(world)’라는 말을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한해가 시작된다는 말은 한 세계가 시작된다는 말이며, 1월 1일의 주기적 재생은 ‘세계’가 주기적으로 재생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해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것은 신(神)이 세상을 창조했던 그 순간을 1월 1일이 재현하기 때문이다. 1월 1일은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자연적 운행의 한 기점에 세상을 정화함으로써, 신들이 만들었던 태초의 우주 회복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서원이 발현되는 시간이다. 오염된 시간은 오염된 세계를 의미하며, 오염된 세계는 지속되지 못한다. 인간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하늘의 신, 대지의 신, 만물의 정령과 교섭하면서, 그들이 더럽힌 세계를 깨끗하게 하고 순결한 시간을 회복해야 한다는 간절함을 희구한다. 지구의 모든 인류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1월 1일에 해당하는 재생의 날이 있다. 이것은 일상적 패턴의 회귀가 아니라 신들의 시간과 닿으려는 가장 깨끗한 시간 의지와 관련된다.



같은 것의 영원한 회귀

반복과 재생의 시간에 관해 더 급진적인 얘기를 떠올릴 수도 있다. 니체의 ‘같은 것의 영원한 회귀’ 같은 수수께끼 사유가 그런 예이다. 니체는 모든 것은 다시 돌아오며, 정확히 같은 것으로 반복된다는 기이한 화두를 인류에게 제시했다. 세계지성사에서 가장 난해한 수수께끼 중 하나인 이 얘기는 시간의 존재론이다.


이에 관한 가장 창의적인 해석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시간과 관련하여 ‘반복’('같은 것의 영원한 회귀')의 문제를 생각해 보면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단 하나의 순간도 모두 다른 순간이지 않은가. 니체가 그러한 상식을 몰랐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니체의 영원회귀 사유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의 차원에서 오히려 거꾸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어떻게? 시간이라는 장에서 만상은 매 순간 유일무이하다. 따라서 반복되는 것은 유일무이한 사건이 계속된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아닌가. 만상은 무상하다는 그 사실이 영원히 동일하게 반복된다. 여기에서 니체의 '같은 것의 영원회귀'는  매 순간 시간은 새로운 사건을 만든다는 사실에 관한 아포리즘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예컨대 새 달력에서 보는 숫자들, 그것들이 지시하는 요일은 가보지 못한 우주의 낯선 행성들과 다르지 으리라. 오늘 하루는 어제 하루와, 이번 주말은 지난 주말과 같은 것일 수 없지 않은가. 2018년 12월 31일은 2017년 12월 31일과 같은 날일까. 우주의 그 어떤 것도 전적인 동일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생성의 개념이다. 매년 봄에 아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만개하는 개나리도, 한여름에 세차게 내리꽂히는 장맛비도, 달력의 패턴을 따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일상사도 동일한 방식으로 반복되는 사태는 없지 않은가.


2019년1월 1일에 포개진 미래는 2018년 1월 1일이 압축했던 시간과는 다르다. 그렇게 우리는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김종길 「설날 아침에」) 2020 1월 1일도 '새해'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를 지닌 사회디자인대학 '미지행'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 예술, 철학, 인문고전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R&D센터, 삼성디자인멤버십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기업 등에서 인문예술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문ㆍ심의강의해 왔다.


현재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 대표, 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 준비위원장이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이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들이 뽑은 2018 여름의 책'으로, 『사물의 철학』이 '문체부 책의 달 인문서'로, 스탠포드대학 폴김 교수와의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가 '책따세가 뽑은 2017 교육 부문 인문서'로 선정되었다.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 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 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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