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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사랑하는 고감독_가족의 확장

<두 여자의 집> 30대 딸과 60대 엄마의 아옹다옹 일상 돋보기

나는 왜 이렇게 가족이란 단어에 마음이 시린 걸까. 다른 사람도 가족이 가장 아프고 따뜻한 단어일까. 항상 나는 그게 궁금했다. 스무살이 지나서 내가 다른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겪는 가정의 붕괴, 해체를 겪은 아이였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파도가 내 삶을 지배할 거라는 걸 서른이 지나서야 받아들였다. 내게 세상에서 가장 큰 단어는 그래서 가족이다.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가족에 대해 말하는 모든 영화, 소설, 시를 읽으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내가 얼마나 가족에 대해 생각하고, 원하고, 미워하는지를. 가족이라는 깔때기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매순간 느낀다. 그래서 (나만큼) 가족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이를 영화로 만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고감독)을 나는 피할 수가 없다. 열렬하게 사랑한다. 공감한다. 

 회사 출근하기 전에 종종 집앞 극장에서 조조영화를 본다. (물론 팀장은 이 사실을 모른다) 장소와 상관없이 보고만 하면 된다는 기자라는 직업의 특수성과 나같은 평일 조조 영화족을 위한 새벽부터 시작하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서비스가 잘 맞아떨어진 결과인데 꽤 즐거운 일탈이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의 버닝을 가뿐히 넘어서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어느 가족'도 그렇게 어느 평일에 조조로 봤다.

 극장에 관객은 나 혼자였다. 영화는 역시 믿고 보는 고감독이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그래서 적당한 거리가 항상 유지되는, 그런데도 매우 쿵짝이 잘 맞는 가난한 어느 가족의 이야기이라니. 웃고 울었다. 내가 아는 고감독은 항상 '가족은 무엇인가, 무엇으로 이뤄져있는가'를 질문해왔다. 이를 확장해 이번엔 '피가 섞이지 않아도 가족이 될 수 있다'라고 적극적으로 말한다. 

 내가 관심있게 지켜본 건 '쇼타'라는 남자아이가 겪는 혼란과 수용이었다. 낳아준 부모가 누군지 모르고, 함께 사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지만 살기 위해 선을 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른들이다. 누구를 가족이라고 부를까. 더군다나 자기보다 더 연약한 '유리'가 있다. 오빠로서 유리에게는 다른 경험을 하게 하고 싶다. 

 만약 친부모라면 쇼타에게 그렇게 도둑질을 가르쳤을까라는 질문을 해보았다. 역시 세상엔 못되고 나쁜 친부모도 너무 많기에 그건 의미없는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이 아이가 세상은 역시 혼자라는 걸 배워야만할까. 그건 아니다. 가족은 한 아이가 자라는 가장 중요한 토양이다. 그 토양의 성분에 따라 자라는 생명의 건강과 성질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 한겨울 찐빵같은 소중함도 여름 한낮의 태양빛같은 부담도 모두 함께 사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온다. 그런 다양한 감정, 기억들이 얽혀지며 아이는 자란다. 적어도 아이에게는 가족이 우주이다. 

 영화 속 가족 역시 결국엔 해체된다. 나는 누가 이 가족을 해체시킬 수 있느냐고 되묻고 싶어졌다. 적어도 법으로 대변되는 사회의 요구때문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진심이란 때론 서류에 적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며 눈물이 났다. 피가 섞인 가족이지만 서로 거짓을 말하고 거짓을 진실로 포장하고 사는 삶은 너무나 많다. (영화에서 '아키'네 원가족이 그렇다) 상황을 오해하고 아마도 그럴 것이라는 예상과 통념이 이 가족을 해체시켰기 때문에 눈물이 났다. 고감독이 전작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가족은 시간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듯이, 나 역시 가족의 진정한 정의는 시간을, 마음을 나누는, 그래서 서로 이해하고픈 개인들의 집단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아직 나는 마음이 아프다. 따로 사는 아버지에 대해 생각할 때 눈물이 펑펑 난다. 무려 따로 산 지 15년이다. 나는 항상 20대 어느 날로 돌아가는데, 어느새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은 내 인생에서 2/3로 줄어들었다니 씁쓸하게 웃는다. 나는 아버지한테 버림을 받았을까.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을 못 하기 때문에 한없이 작아지는 순간이 있다. 다른 누군가에게서 사랑받지 못할 거란 두려움도 조금은 있다.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그럴 수 있다라는 패배감같은 게 있다. 반대로 원가족이 없는 시간동안 아버지는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묻는다면, 나 역시 잘 모르겠다. 그만큼 서로 멀어져가는 걸 바라만 본다. 

 나는 고감독처럼 가족의 개념을 확장하자고 말하고 싶다. 혈연과 결혼제도로 이어진 제도적 가족주의와 함께 시간을 보내 마음을 나누는 정서적 가족주의를 구분할 수 있다. 이 둘이 한 집단에서 이뤄지면 좋지만 그렇지 않는다 해도 가족이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그래야 사회가 말하는 가족의 해체로 오는 여러 사회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다. 지금은 불완전한 개인에게, 가족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고 있다

영화 <어느가족>의 한 장면. 가족의 가장 즐거운 한 때.    

아래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고 적었던 글이다. (난 그때도 비슷한 말을 했구나)

 

 2013년작.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료타는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 일에 열중한 덕분에 회사에서도 인정받았다. 순종적인 아내는 자신을 잘 따른다. 아들 역시 자신의 말을 어긴 적이 없다. 피아노를 배우라는 아버지 말에 열심히 피아노를 배운다. 못해도 배운다. 그렇게 잘 나가는 그에게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이 들린다. 7년 전 병원에서 아이를 낳자마자 아이가 다른 집 아이랑 바꼈다는 것. 그렇게 만나게 된 친자식의 부모는 료타와 너무나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다. 작은 가게를 하며 교양이라고는 없어보이는 말투, 때묻지 않게 만들어 온 자신의 가정에 균열이 가는 걸 료타는 참기 힘든다. 무엇보다 자신을 닮았다고 믿은 아들이 달리 보인다.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 피는 못 속인다는 생각에 잃어버린 친 자식을 데려오지만, 그 아이는 지난 시간동안 료타와는 너무나 다르게 자라있다. 

 영화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고 하지만 '그렇게 가족이 된다'로 읽어도 무방하다. 아이의 시선으로 영화를 봐서일까. 마음이 아팠다. 1년 정도를 적응기간을 둔다고 하지만 료타가 기른 아들을 친부모에게 보낼 때 보여준 모습은 어른의 방법 그대로를 강요할 때 특히 아팠다. 료타는  "이제 거기서 살아야한다. 그게 미션이다. 그 아버지가 널 더 사랑한다"라며 `자신을 잊는 방법'을 가르친다. 아마 그 나름대로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해 나온 말이었을 거란 거도 안다. 하지만 아이는 어떻게 들었을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아버지 말을 믿고 따르도록 길러진 아이는 꾹 참고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 티도 안내고 내색도 안한다. 왜 자신이 그 집에서 커야 하는 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버틴다. 다행히 친부모는 가난해도 아이에게 시간과 정성을 쏟는 좋은 부모들이다. 좁은 욕조에서 동생들과 함께 목욕하는 건 아이에게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다.

 2시간 가까운 영화가 지나면서 남긴 질문은 '함께 하는 시간'에 대해서다. 료타는 그렇게 바꿔 데려온 친자식이 자신을 거부하는 걸 이해를 못한다. 가까워지려고 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아 신경써줘도 소용없다. 정은 그렇게 쌓일 수가 없다. 함께 하는 시간 만이 극복할 수 있다는 걸 어른인 료타는 까먹은 걸까. 그러다 아이가 가출을 해 길러준 부모에게로 갔을 때야, 아이가 느꼈을 상처를 돌아본다. 나란히 옆으로 난 길을 말없이 걷는 료타와 아들. 료타는 자신이 기른 아들에게 "이제 미션은 끝났다"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부모라면, 아이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가족이라면, 소중한 사람이라면, 시간을 함께 보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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