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9. 딸의 흰머리

30대 딸과 60대 엄마의 아옹다옹 일상 돋보기

 나는 엄마를 닮아 새치가 많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새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났다. 내 짝꿍과 뒤에 앉은 친구가 수학 시간에 내 머리에 난 흰머리를 뽑아주다가 학교에서 가장 무섭기로 소문난 수학선생님한테 걸려 다 같이 무지하게 혼난 기억이 있다. 고백하건대 나는 머리가 뽑힐 때의 자극이 싫지 않다. 흙에 고정된 식물의 뿌리를 뽑을 때의 개운한 느낌과 같다. 친구들은 그런 자극을 즐기는 지극히 변태 같은 나를 위해, 그리고 지루한 수업시간을 빠르게 보내기 위해 잠시 선생님 말씀 말고 다른 것에 집중했을 뿐이었다. 

 친구들과 헤어지고도 한참 동안은 연인 또는 엄마가 흰머리를 뽑아줬다. 나랑 가장 친했던 당시의 친구랑 나는 주말에 만나서 할 일 중에 흰머리 뽑기 시간을 두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 골라주는 원숭이 한 쌍같아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새치를 뽑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서른이 지나서였다. 여성의 흰머리는 남성과 달리 귀 옆머리에서 많이 난다. 나도 그런 편인데 언젠가부터 흰머리가 다 뽑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난 데다 내 머리숱이 점점 줄고 있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지난해 여름에는 머리를 질끈 묶다가 100원짜리 동전만큼으로 줄어든 머리숱 때문에 울 뻔했다. 이후 나는 엄마의 탈모방지용 샴푸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 평생 머리숱이 많다는 생각으로만 살았는데 내가 머리가 그렇게 빠질 줄은 정말 몰랐다. ㅜ 이유를 따져보면 지난해 5~8월 나는 인생에서 가장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몸이 바로 반응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머리발은 매우 중요하다! 다행히 지금은 다시 적당히 풍성해졌다. 탈모방지샴푸 만세!

 그래서 새치머리용 자연갈색 염색약을 사다가 염색을 하고 있다. 45살부터 20년째 홀로 염색을 하며 이제는 염색의 달인이 된 엄마가 나의 전담 미용사이다. 엄마의 친구인 동네 미용실 아줌마의 조언대로 머리카락이 상하지 않도록 약에 계란 노른자를 섞어 두 달에 한 번꼴로 하고 있다. 기분전환에는 파마를 하기보다 염색을 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 나는 염색을 하고 나면 기분이 참 좋다. 좀 더 자신감이 생기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5월의 마지막 주말 아침에도 염색을 했다. 며칠 전부터 엄마에게 염색 시간을 예약한 나는, 염색약 세트와 계란 등을 준비했다. 아무리 달인이라도 사소한 실수를 할 수 있기에 검은 나시티와 검정 바지로 옷을 갈아입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의 전부이다. 그리고 엄마와 나는 볕이 잘 드는 베란다 창가 앞에 앉아 의식을 치른다. 

 “나보다 10년은 더 먼저 염색을 하네. 머리를 많이 써서 그런가. 너는 왜 이렇게 흰머리가 많냐. ”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렇지. 염색 안 하면 흰머리가 너무 많아서 창피해.”

 엄마와 나는 할 때마다 거의 비슷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엄마도 염색을 하지 않으면 백발인데, 나도 들춰보면 옆머리의 1/3은 백발이다. 나름 동안 피부라고 자랑하는데 어울리지 않는 흰머리라니. 엄마는 너무 많은 내 흰머리에 놀라고 나는 어서 가려달라고 미용사에게 요구를 한다. 30분을 걸려 염색을 해도 힘이 센 흰머리에는 겨우 조금 갈색 물이 들을 뿐 한 달 후면 다시 하얗게 물이 빠져있곤 한다. 

 “염색 자주 하면 눈 나빠진다는데... 너 벌써부터 염색해서 어쩌냐.”

 “어쩔 수 없지. 근데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 염색한다고 눈이 나빠지겠어? 그나저나 엄마 없으면 나 이제 누가 염색해주나.”

 엄살을 부려보았다. 엄마의 고성이 이어진다. 

 “야. 돈 벌어서 미용실 가면 되지. 엄마 없다고 이거 염색 안 하냐.”

 내가 돈이 없어서 염색을 못 한다는 말이 아닌데 엄마는 집안의 가장으로 알뜰한 내가 염색도 안 하고 (자기관리 안 하고) 살까 봐 걱정되셨나 보다. 그럴 리가. 암튼 나도 언젠가부터는 엄마처럼 혼자서도 잘 염색하는 법을 배워야 할 텐데 슬슬 생각 중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엄마 염색을 한 번도 도와드린 적이 없다. 그래서 엄마의 뒤통수만 하얗게 눈이 내린 것처럼 흰머리가 내려앉아있는 것을 본 적도 있는데, 염색할 때마다 엄마한테 미안하다. 

 이렇게 엄마가 머리를 만져줄 때면 어릴 때 엄마가 머리를 빗고 땋아주었던 생각이 난다. 나는 아직도 누가 내 머리를 만져주는 것을 좋아하는데 아마도 사랑받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그립고 좋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엄마는 그런 추억을 내게 주었다. 그때 나는 꼬마였고, 엄마도 내 나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느새 나도 엄마를 따라 흰머리가 나고 엄마가 내 머리를 땋아주는 대신 염색을 해주고 있다. 모녀가 함께 한 세월이 이렇게 오래되었구나, 이렇게 같이 늙어가는구나 생각하면 애잔하다. 엄마도 늙은 딸을 보면 여러 생각이 들겠지? 나는 요즘 엄마와 가장 가깝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 행복하고, 또 이 행복이 아주 오래되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8. 지방선거 앞 모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