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위에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석사’ 그거 예전에 하나 땄다. 예전에 따놓은 게 있다고 썩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다, 나의 가치관에 따르면.
나는 늘 갈증이 있었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느끼며, 더 시원한 숨을 쉬며 이야기하고 싶었다.
늘 내 안에 맴도는 얼마 되지 않는 경험과 내용을 가지고 돌려쓰다 보니 지치게 된 것이다.
내가 여성학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대체로 다들 “멋지다”라고 평가해 주었다. 아마 마땅히 평가할 말이 떠오르지 않기도 할 것이고, 긍정적인 말로 나를 격려하느라 그랬을 게다. 지금에 와서 왜 공부하는지, 그것도 왜 ‘여성학’인지 물었던 이도 있었던 것 같다.
나의 이유는 단 하나이다. 나의 엄마사회학 콘텐츠 사업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내가 재미있어야 상대도 재미있게 할 수 있다. 내용을 다루는 내가 재미있어야 하는데 지루해졌다. 보다 날카로운 관점으로 내가 보지 못했던 부분을 더 보고 싶고 설명하지 못했던 것을 설명하는 언어를 찾고 싶었다. 나를 이루는 시간과 공간, 관계와 구조를 다시 이해하고 싶은 마음, 이 마음 때문에 또 큰돈을 쳐들여 공부하는 것은 사치이기도 하다. 졸업 후 현실적인 유익이 대단히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그저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는 naive 한 접근이기도 하다.
결혼 후 남편이 대학원을 간다고 했을 때 정말이지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공부를 통해 얻어지는 성취감과 자신감, 그리고 이윽고 더욱 드높아질 자존감은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소중한 자산이 될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미리 이야기해 두었다. “나중에 나 공부 또 하고 싶을 때 나도 2000만 원 쓸 거니까 그리 아시오~~” 이 말을 해두어서 걸쩍지근함을 많이 떨치고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던 듯도 하다.
여성학은, 단순히 '여성'만을 위한 학문이 아니다. 이 학문은 사회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렌즈를 제공한다. 익숙함 아래 깔려 있는 질문되지 않은 것들, 자명하다고 여겨졌던 관계와 제도, 그리고 그 안에서 가려지고 침묵해 온 목소리들을 다시 불러낸다. 그 침묵이 능동적 침묵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의해 강요되거나 나도 모르게 세뇌당했던 결과임을 알게 되면, 침묵을 깨는 나의 논리와 언어를 찾고 싶지 않겠나.
나는 엄마로서, 창작자로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살고 있다. ‘엄마'로 불리는 순간에도, '대표'로 불리는 순간에도, 늘 무엇인가 설명할 수 없는 갈증과 무력감을 느껴왔다. 감정을 배제하고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의 언어를 쓰고 싶은데 어떤 때는 마치 어버버 말을 떼기 시작하는 아이 같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여성학을 제대로 만나기 전부터 여성학적 접근, 아니, 그것보다는 여성운동적 접근을 일상에서 취해왔다. 개인의 의지 문제로 자책하면서 온갖 감정에 사로잡혀 나 자신을 망치는 시간을 거치며 더 이상 이럴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끝에 최대한 객관적이고 냉정한 언어를 채택하려 노력했다.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회구조적인 원인이 나에게 침투하여 왔는지를 설명하여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내고 다음의 액션을 냉철하게 설계하고 싶었다. 나의 분노, 억울함, 그리고 계속 끓고 있는 열망은 결코 사적인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여성학을 공부하며 나는 질문을 배운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는 힘, 존재를 언어화하고, 침묵을 문장으로 옮기는 용기, 그리고 무엇보다, 내 경험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갖추어간다.
나는 남은 인생동안 지속하고 싶다. 나를 이루는 것, 당신을 이루는 것, 우리를 이루는 것을 이해하고 표현하고 싶다. 더 많은 질문은 더 많은 대상에 대한 사랑을 키워주리라는 생각도 한다. 그 긍정적이고 풍족한 감정 가운데 살아간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