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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아이 간의 유대관계는 권리

by 말쿡 은영

내가 아마도 어디서 주워듣고 그런 얘기를 해왔겠지만,

돌봄은 책임의 형태를 우선시하지만, 돌봄이 우리에게 주는 가치를 촘촘히 따져보면 행복추구의 관점에서 권리로서 향유되어야 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기러기 아빠의 상황을 살짝 그려보자. 밑 빠진 독에 계속 물 붓는 것도 아니고, 이건 뭐 돈 버는 기계인가 싶을 정도로 한국에서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생계를 부양하는 것을 넘어 아이의 지위 상승을 위한 고비용의 교육을 위한 비용을 감당하는 것인데, 아빠로서는 아이를 위한 최선의 돌봄이라 여기고 묵묵히 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와의 유대관계는 점차 희박해져 가는 이 상황이 진정한 돌봄 관계인가? 아이의 삶의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골고루 공유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우며 서로를 느끼고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은 없이 재정적 자원만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도 한국 사회의 대부분의 남성들은 자신의 돌봄에 대하여 생계부양의 책임을 필요충분조건으로 하고 있다. 조금 더 정서적인 돌봄을 보태려 노력하는 아빠의 경우,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의 내용이 어떠하든 간에 함께 시간을 보내고, 조금 더 애쓴다면 부대끼며 친밀하게 놀아주는 정도이다.


이러한 형태는 여남 모두에게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을 할 때 누구나 아마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아빠들이 돌봄에 참여하는 수준이 점차 높아져가고 있지만 돌봄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살펴볼 때 여전히 성별로 나뉘어 있다. 자세한 것을 일일이 열거하진 않겠고,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남성은 수동적으로, 즉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고 여성은 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 해야 할 것을 온전히 다 책임지고 있다.


사회적인 맥락에서 구성되는 소위 '젠더 정의'는 여남 모두에게 돌봄과 시장 참여 모두를 균형 있게 누릴 수 있는 구조와 문화를 만들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이를 위해 국가와 사회는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가 돌봄과 노동에서의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회재생산이 아닐까? 남과 여가 모두 돌봄과 노동의 권리를 누리는 방향 말이다. 선택하고자 하는 바를 놓고 협의하여 적절하게 정하고 때로는 조정해 가며 삶을 영위하는 그런 모습을 그려본다.


여성의 노동에 관해 덧붙이자면, 시장노동의 영역에서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장기간에 걸쳐 교육, 훈련, 사회적 역량에 많은 비용과 자원을 투입해 왔다. 나의 경우,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잘하고, 그 이후 취직 잘하는 삶을 그리도록 격려받으며 자아 성취를 위한 노력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이는 시장참여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정당하게 성과를 거둘 권리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여전히 성차별적 문화와 성역할 고정관념으로 인해 이 권리가 온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공정성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의 자원 낭비이자 비효율이다. 사회적 활동으로 보다 나아가고 싶어도 돌봄 책임이 우선시되어 돌봄 책임을 충족시킨 후 남는 자원에 한하여 사회적 활동을 설계하다 보니 개인의 성취욕구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의 일들이 남아있게 된다.


결핍이 강요되는 이 사회구조는 분명 잘못되었다. 향유하고자 하는 행복을 분명히 하고, 그것을 이야기하고 상호 존중하며 이룩할 수 있도록 하는 실질적인 논의가 계속 생겨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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