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행위자로서 내가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비로소 ‘할 수 있다’는 감각이 현실화되는가?”
단순히 일상에서의 행동 항목에 대해 '할 수 있다', 또는 막연하게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의 관념을 가지는 것이 아닌 매우 구체적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 사회적 행위자로서의 '할 수 있다'로 가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내 경험이 말해질 수 있고, 의미가 있으며, 사회적 언어와 연결된다.”
“할 수 있다”는 감각은 자기 내부에서만 생성되지 않는다. 분명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적 요인에 의해 나에게 씌워지는 억압 때문에 느끼는 답답함이 있다. 그런데 내가 느끼는 '감정'을 주로 인지하다 보면 이건 그저 내가 개인적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결과라고 자기 탓을 한 적은 없는가?
‘말해지지 못하는 구조’, 누군가의 목소리가 사회에서 정당한 이야기로 승인될 때, 즉 “내 경험도 분석될 수 있고, 설명될 수 있고, 사회에 의미가 있다”는 인식이 형성될 때 비로소 “할 수 있다”는 감각이 구체화된다고 본다. 이것이 내가 추구하는 사업의 방향이기도 하다.
정리하면, 경험을 해석할 언어가 있다. 나의 언어에서 출발하고 공유하고 협의하고 합의되는 언어가 된다. 그리고 그 언어가 사회적 구조와 접속된다. 그 접속을 다른 사람이 인정한다. 이게 주어지면, “나 같은 사람도 사회적 주체로 말할 수 있다”가 되는 것이다.
“내 행동이 사회에 미세하나마 ‘효과’를 낳는다.”는 피드백. 그 효과를 체감하여야 '할 수 있다'는 감각의 핵심이 된다. 인간은 행동 → 결과 → 피드백이라는 순환이 생길 때 능력감을 느낀다.
작게라도 내가 움직인 결과를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결과가 타인에게 전달되거나, 읽히거나, 반응을 낳아야 한다.
그 피드백이 다시 나의 정체성과 실천을 강화한다.
이게 없다면, 아무리 개인적으로 잘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는 감각이 남는다.
SNS에 무수히 많은 자기 인식, 자기 확인의 포스팅이 올라오는 이유가 이것일 게다.
여성들이 경력·돌봄 구조에서 반복적으로 “내가 해도 변화가 없다”라고 느끼는 이유도 이 피드백 루프의 붕괴 때문일 것이다.
“전체 구조는 바꿀 수 없어도, 부분 영역에서는 나의 실천이 가능하다.” 이것은 일종의 믿음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감각을 가지려면, 구조를 모르는 순진함도, 구조에 완전히 압도되는 체념도 아닌, “제약은 있다. 그럼에도 이 부분에서는 내가 움직일 수 있다.”라는 인식을 갖추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조금 더 발전적(?)으로 이야기해서, '우리 판을 만들어서 상대(?)를 초대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한다. 소위 기득권이 활개를 치고 있는 판의 논리에 우리가 들어가면, 일방적으로 당하기 쉽기 때문에 우리의 문화, 우리의 언어를 정립하고 우리의 공간을 창조하고 거기에 초대하는 방식을 이야기하고 싶다.
결국 이러한 공간, 이러한 지점에서 나의 실천을 투입할 수 있고, 구체적으로 실현된 내가 존재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위치가 삭제되지 않는다.” ‘말할 수 있는 주체’로 승인받지 못한 사람은 ‘할 수 있다’는 인식도 갖기 어렵다. 왜냐면 사회적 장치가 이미 그들을 ‘실천할 수 없는 자’, ‘정치적 주체가 아닌 자’로 만들어놓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경험·목소리가 주변화되지 않고, 커뮤니티 또는 사회적 관계망에서 나의 위치가 승인되며, 나의 발화가 “대표성과 실천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면? 비로소 사회라는 무대에서 스스로를 “행위자(actor)”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조건이 될 때, 사회적 행동자로서의 나는 "힘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