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폴란스키: 대학살의 신(Carnage)
대학살의 신... 제목부터가 매우 거창하며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다루거나 아니면 호러 슬래셔 무비인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대학살의 신>의 원래 제목은 "Carnage(카니지)"로서 직역하면 "대학살"을 의미한다. 영화 <대학살의 신>은 프랑스의 극작가인 야스미나 레자(Yasmina Reza)의 희곡 <Le Dieu du carnage>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때 <Le Dieu du Carnage>는 영어로는 "The God of Carnage"가 되어 영화의 한국어 제목과 일치한다. 이때 "Carnage"는 프랑스 구어로 유린, 황폐, 파괴, 난리통을 뜻하기도 한다는데 영화에서의 <대학살의 신>은 바로 "난리통"을 의미할 것이다. 제목 자체는 무슨 Genocide(집단 살해)와 같은 뉘앙스로 이해되어 전쟁 영화나 공포, 엽기 슬래셔, 호러물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이런 주제와는 전혀 무관하며 말 그대로 "난리통"의 의미가 더 적확할 것이다. 영화는 난리통, 즉 교양과 예의로 무장한 두 쌍의 중산층 부부가 한정된 공간에서 기어이 위선과 가식을 벗어던지고 막말과 추태의 난리통을 펼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일군의 아이들이 모여 놀고 있는, 강변에 위치한 놀이터의 어느 한적한 일상의 오후를 카메라는 원경으로 담아낸다. 놀던 아이들 사이에 다툼이 발생했는지 두 아이가 언쟁을 벌이다 급기야 한 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막대기로 다른 아이의 얼굴을 후려 친다. 뭐, 나름 살벌한 순간일 수 있겠지만 영화는 경쾌한 배경음악과 함께 카메라는 여전히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이 장면을 무심한 듯 담아내고 있다. 의도적으로 보이는 카메라의 이런 원경의 거리두기는 으레 아이들의 다툼이란 게 그러려니 할 수 있는, 한때 그저 스쳐 지나버릴 일상의 사건임을 강조하는 듯하다.
컴퓨터 모니터의 흰 바탕은 글자로 채워지고 있다. 『1월 11일 오후 2시 30분, 브루클린 공원에서 있었던 언쟁 중 11살 재커리 코원이 막대기로 무장한 채 우리 아이 에단 롱스트릿의 얼굴을 쳤다, 에단은 윗입술의 붓기와 타박상은 물론 앞니 두 개가 부러졌고 오른쪽 앞니는 신경에 손상이 갔다...』 한 남자가 말한다, '무장'이라... 타이핑 중인 여자가 반문한다, '무장'이란 표현이 걸리세요? 그럼 뭐라고 하지? 막대기를 들고? 가지고? 아, '가지고'가 좋네요. '무장한 채'라는 표현은 삭제되고 '가지고'라는 표현으로 대체된다. 타이핑을 하고 있는 여자는 피해자 쪽 아이 에단의 엄마 페넬로피 롱스트릿(조디 포스터 분)이고 남편 마이클 롱스트릿(존 C. 라일리 분)이 뒤에서 보조하고 있다. '무장'이란 표현을 걸고넘어진 남자는 가해자 쪽 아이인 재커리의 아빠 앨런 코원(크리스토프 왈츠 분)으로 아내 낸시 코원(케이트 윈슬렛 분)과 함께 피해자 측 롱스트릿 부부의 집에 방문하여 네 명이서 함께 진술서를 작성 중이다. 양 측 부모 모두 중산층 이상의 가정을 이루고 있으며 그런 경제적 지위에 걸맞은 적당한 교양과 예의를 갖추고 아이들이 벌인 사건을 서로 이성적이자 합리적으로 해결하고자 모였다. 오가는 대화 속에 은연 가시가 돋기도 하지만 원만한 대화를 통해 적절한 합의점을 찾았기에 이렇게 진술서를 마무리한다. 부모들끼리의 원만한 해결에 만족하여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웃으며 헤어지려는 찰나 앨런에게 걸려온 전화 때문에 한동안 대화가 끊긴다. 통화를 마치고 롱스트릿 부부의 집을 나서는 코원 부부, 이 상태로 그냥 헤어졌다면 이 영화의 제목인 '대학살'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자신의 신변잡기를 팔아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자 딸아이가 애지중지하던 햄스터를 몰래 버렸다는 마이클의 말에 낸시의 반응이 심상찮다. 거기에 더하여 페넬로피는 재커리가 에단에게 사과해야 한다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기에 다소 껄끄러운 상황이 될까 염려한 마이클은 커피나 한잔 하고 가라고 제안했고 이 제안을 코원 부부가 덥석 받으면서 대학살의 전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낸시는 투자 관련 브로커로 일하고 있으며 남편 앨런은 변호사로 현재 제약 관련 분쟁 소송을 맡고 있다. 덕분에 때를 가리지 않고 그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대학살로 가는 기폭제의 역할을 한다. 마이클은 가정잡화 판매업을 하고 있으며 페넬로피는 전업주부지만 아프리카 등의 제3세계 문제와 여러 진보적 의제에 대하여 PC(정치적 올바름)로 무장한 채 스스로 진보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예술, 문화 관련된 분야에 소소한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 롱스트릿 부부가 대접한 커피와 전날 만든 코블러(파이의 일종)의 맛을 칭찬하며 자연스레 코블러 이야기로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그냥 빈 말이 아니라 바쁜 업무로 인해 점심을 거른 앨런은 끊임없이 코블러를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이런 화기애애한 대화를 깨트린 것이 앨런에게 걸려온 전화였고 한 동안 대화가 끊어지며 어색한 분위기로 앨런의 소송 관련 통화 내용을 들어야만 했다. 이제 진짜로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서로의 관대함을 칭찬하며 헤어지려는 순간 페넬로피는 재커리가 자신이 벌일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물었다. 친구 얼굴 '망친' 건 알고 있냐는 페넬로피의 질문에 변호사라는 직업적 특성상 단어 표현 하나하나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앨런은 진술서 작성 시의 '무장'이란 표현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망친'이란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아이들 관련해서 앨런과 페넬로피 사이에 은근 가시 돋친 말들이 오갔다. 다시 마이클이 나서서 아이들을 서로 화해시키자고 제안했으며 재커리가 에단에게 사과하는 만남을 갖기로 했다. 문을 나서며 낸시는 에단을 데리고 자신들의 집으로 방문해 달라고 정중히 요청했지만 이번엔 마이클이 피해자가 먼 길을 갈 이유가 있느냐며 조심스레 반문했다. 다소 빈정이 상한 상태에서 마지못해 코원 부부는 다음 날 재커리를 데리고 롱스트릿 부부의 집을 다시 방문하기로 했다. 하지만 깐깐한 페넬로피는 재커리의 진정성을 따지고 들었고 이 과정에서 제대로 빈정이 상한 앨런의 목소리가 곤두서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달아오른다. 마이클은 달아오른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번엔 제대로 된 커피를 한 잔 하자고 제안했다. 페넬로피와 앨런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신경전과 과열되는 분위기를 감지한 낸시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부부는 다시 집으로 들어선다.
두 번째로 다시 모인 네 사람, 하지만 이번 판은 의도와는 다르게 제대로 맞붙게 되는 회전(回戰)이 될 것이다. 마이클이 커피를 만들러 간 사이 낸시는 페넬로피가 아끼는, 이미 절판된 베이컨 화보집을 펼치며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이야기로 어색한 침묵을 깨뜨렸다. 마이클이 커피를 들고 돌아와 남아있던 코블러를 마저 권하며 분위기를 희석시키고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도한다. 그렇던 차에 마이클은 아이들이 왜 싸웠는지 도통 에단이 이야기하지 않는다며 그 이유를 물었다. 재커리가 고자질쟁이라고 해서 에단이 재커리를 패거리에 끼워주지 않았다는 이유란다. 패거리란 말에 두 남자는 서로 신이 나서 골목대장이었다던 남자들만의 어린 시절 라떼 감성을 공유했지만 페넬로피는 이런 남성들의 마초적 추억팔이가 영 못마땅하다. 페넬로피가 재커리와 대화를 해도 되겠냐고 물었을 때 낸시는 당연하다고 동의했지만 남편 앨런은 떨뜨럼하다. 이전부터 페넬로피의 계몽적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던 앨런은 잘해보라며 비꼬듯 말을 던졌고 이 말에 페넬로피는 발끈하며 자식한테 왜 그리 관심이 없냐고 되물었다. 자기 아이에 대한 주제넘은 페넬로피의 관여에 역시 발끈한 앨런이 이 자리는 자신의 아들이 그녀의 애를 다치게 했다는 사실 관계만을 다뤄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페넬로피는 그의 말을 자르고 한 단어를 덧붙였다, '고의로'... '무장', '망친', 이번에는 '고의'란다, 상당히 심기가 상한 앨런, '고의'란 말은 변호사인 자신의 전문 분야라면서 날이 선 본격적 설전에 참전을 선언하려는 때, 낸시가 남편을 변호하며 중재에 나섰고 저녁에 자신이 아들을 데리고 다시 오겠다며 짐을 챙겨 일어섰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페넬로피의 집을 나섰으면 되었던 터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또 울리는 앨런의 핸드폰이 문제다. 정중한 작별 인사로 마무리하기 위해 낸시와 롱스트릿 부부는 그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앨런의 통화가 길어지는데, 시판 중인 약의 부작용으로 사망자가 발생한 제약 회사의 변호를 맡고 있는 터라 앨런은 전화를 통해서 재판 대응 방안을 심각하게 주고받는다. 계속되는 통화에 짜증이 난 페넬로피는 일부러 큰 소리로 다른 대화를 유도하며 앨런을 방해하지만, 오디오가 섞이는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앨런, 이제 마이클도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낸시는 난감해서 어쩔 줄 몰라한다.
앨런이 통화를 마치자 이번에는 마이클이 비꼬듯 그의 통화 내용을 언급한다. 누가 통화 내용을 엿들으래요? 앨런의 짜증 섞인 말에 누가 내 집에서 맘대로 통화하래요? 라고 응수하는 마이클, 어린 시절 마초적 낭만의 추억으로 잠깐 맺어진 남성 동맹이 깨지는 순간이다. 아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직업을 은근히 깎아내리는 비딱한 말들이 오가며 설전이 본격화될 시점에 낸시가 몸이 안 좋다며 남자들 사이의 전투를 힘 빠지게 만든다. 어떻게든 원만하게 마무리하려고 애쓰느라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실제로 낸시의 얼굴은 창백하다. 토할 것 같다는 말에 페넬로피는 서둘러 콜라를 찾았지만 하필 냉장고에 넣어둔 콜라가 없었다. 미지근한 콜라 한 모금으로 겨우 속을 진정시킨 낸시는 이번에는 정색하고 말했다, 자신들의 자식 교육은 자신들 방식대로 하겠다고... 마이클도 당연하다고 동의했지만 페넬로피의 생각은 또 다르다.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려는 순간, 또 울리는 앨런의 전화, 이번엔 낸시가 열 받았다, 그만해, 전화 좀 꺼! 젠장! 이번엔 코원 부부 사이의 투닥거림이다. 하지만 적잖은 스트레스에다 미지근한 콜라가 문제였는지 남편에 대한 불평을 토로하던 중 낸시는 페넬로피가 애지중지하는 그 베이컨 화보집 위로 적지 않은 토사물을 게워내었고 토사물은 튀어 앨런의 옷까지 적시고 만다. 미안하다며 어쩔 줄 몰라하는 코원 부부를 급하게 화장실로 안내한 뒤 롱스트릿 부부는 그 화보집을 어떻게 살릴 건지 요란을 뜬다. 토사물을 치우고 냄새를 없애려 대량의 향수를 투척하며 '악몽'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페넬로피, 당연히 둘 사이에서는 화장실에 있는 부부에 대한 뒷담화가 시작된다. 화장실에서는 또 그들대로 바깥의 부부들에 대한 불평이 그들의 주된 대화가 될 것이다.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화장실에서 나온 낸시, 구토 후에 머리가 어느 정도 맑아진 모양이다. 남편은 그만 나가자고 부추기는데도 지금까지 계속 참아왔던 그녀는 정중한 사과와 함께 참전을 선언한다. 화장실에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흉을 본다는 것은... 에단이 재커리에게 했다던 '고자질쟁이'라는 단어가 문제였다. 이때 또 눈치 없이 걸려오는 앨런의 전화, 다시 대화가 중단된다. 게다가 앨런이 전화를 끊자마자 한다는 첫마디가 '그런 소릴 들으며 나도 열 받겠어요' 라는 말이다. 이에 지지 않고 마이클이 '사실이라면 다르죠'라고 받아치면서 이제부터 제대로 된 전쟁의 시작이다. 우리 애가 고자질쟁이란 이야기냐, 그렇다면 당신 애도 마찬가지다, 코원 대 롱스트릿, 그제야 제대로 그어진 전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자신들의 아이를 변호하는 가식 없는 말의 향연이 하이톤으로 이어진다. 이 와중에 이번엔 마이클의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고 또 대화의 중단이다. 엄마의 말로는 관절염 때문에 앨런이 변호를 맡고 있는 문제의 그 약을 먹는다는 것이다. 이에 앨런이 비꼬듯 드시고 문제가 없다면 증인을 요청하겠다고 하자 열 받은 마이클은 문제가 생긴다면 고소장 맨 윗 줄에 자신의 이름이 있을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말이 안 통한다며, 서로 포기했다면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는 두 쌍의 부부들, 씩씩거리는 낸시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며 더 이상 페넬로피의 고상한 설교 따위는 듣기 지겹다는 앨런의 말에 뚜껑이 열린 마이클이 직격탄을 날린다, 당신들을 보니 재커리가 왜 그 모양인지 알겠군요! 이 말에 완전히 폭발해 버린 낸시,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말고 돌아서며 그날 아침에 마이클이 버렸다던 햄스터를 언급하며 당신은 살인자라고 소리친다. 이번에는 햄스터를 두고 낸시와 마이클 사이에서 죽였네, 안 죽였네 실랑이가 벌어지면서 오가는 고성이 복도식 아파트를 흔들었고 급기야 옆집 사람이 무슨 일인가 하며 문을 열었다. 갑자기 민망함을 느낀 페넬로피가 옆집 사람에게 사과하면서 코원 부부에게 급하게 손짓했고 마이클과의 설전을 이어가던 낸시는 얼떨결에, 그 통에 앨런도 어쩔 수 없이 롱스트릿 부부의 집으로 다시 들어서게 된다. 아~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인 동시에 또 다른 회전의 시작이다.
급하게 코원 부부를 다시 집으로 들이고 문을 닫으며 PC에 있어서는 전혀 눈치 없이 자신의 소신을 펼치는 페넬로피가 이번엔 낸시의 말이 맞다며 그녀의 편을 든다. 이제 햄스터로 인해 롱스트릿 부부 사이가 심상치 않게 달아오른다. 설치류나 파충류를 끔찍이 무서워하는 마이클은 그저 햄스터를 밖에 내다 놓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집에서 살인자 소릴 듣고 심지어 자신의 와이프까지 그 비난에 동조를 하다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만 페넬로피는 어쨌거나 남편이 잘못했다고 한다. 아이가 얻어터져서 온 것하고 햄스터하고 무슨 관계인가? 지금 상황이랑 아무 상관없는 가족 내의 문제를 끄집어내는지? 자신은 그저 화해의 문을 활짝 열어줬을 뿐인데... 그동안 페넬로피에게 눌려왔던 마이클이 폭발한다. 자신은 노력했지만 이제 대화는 끝이다, 아내가 자신에게 진보의 옷을 입히려 했지만 사실 자신은 이런 말랑말랑한 대화는 질색이다, 성질도 급하고 있는 그대로 내뱉고 싶다며 화를 낸다. 앨런이 우리 모두 다 그렇다고 동조했지만 우린 성질이 더러운 사람들이 아니라고 페넬로피는 반박한다. 이에 마이클은 당신이야 항상 잘났지라며 눌러왔던 본심을 아내에게 쏟아낸다, 당신 각본대로 보조를 맞춰 줬고 당신의 고상함을 존중해. 믿었던 남편의 반격에 충격을 받은 페넬로피, 그래 난 고상해! 누군가는 그래야지, 더럽게 성질내는 게 좋아? 그럼 서로 대화도 없이 고소하고 그래? 너무 지나치잖아!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페넬로피, 이때 또 걸려오는 앨런의 전화, 마이클은 스카치 위스키를 꺼내고 이번엔 술이 두 남자를 같은 울타리로 묶어 준다. 한 편이 된 두 남자는 스카치의 맛을 추켜세우며 서로의 짝을 험담하기 시작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자연스레 여자들도 한 편이 되어야 한다, 왜 우리들한텐 술 안 줘? 아이반호와 존 웨인의 추종자가 쥐 같은 걸 무서워해요? 낸시는 같잖은 남성들의 어린 시절 용감무쌍을 비꼬았고 페넬로피는 술 한잔에 훌쩍거리며 남편의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자신의 세계에 자신을 가둬놓고 결코 바꾸려 하지 않는 사람과 사는 것은 힘들다며 개인을 넘어서는 변화, 개혁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침 손주를 걱정하는 마이클의 엄마로부터 전화가 와서 열띤 논쟁은 잠깐 휴지기를 갖게 되었지만 페넬로피의 그런 믿음에 대한 앨런의 반박으로 휴지기는 금방 끝이 난다. 페넬로피, 누구나 자기밖에 생각 안 해요, 물론 믿고 싶죠, 개혁이 가능하다고, 그래서 당신이 다르푸르 책을 쓰겠지만... 어떤 의도인지 감이 오네요, 앨런의 차분한 깐죽거림은 계속된다, 역사엔 학살 천지인데 그중 하나 골라 책을 쓰리라, 미소를 지으며 자기 구원의 방법도 여러 가지라며 페넬로피의 PC적 입장을 자신의 구원으로 못박아 버린다. 난 구원하려고 책을 쓰는 것이 아니에요! 읽어보지도 않았잖아요, 내용도 모르면서... 발끈하는 페넬로피의 반박. 아님 말고... 라는 앨런의 조소에 머쓱해진 페넬로피는 낸시의 구토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마구 살포했던 코롱 향수 냄새가 진동한다며 말을 돌린다. 그러다 한숨을 쉬며 왜 모든 게 다 어렵죠? 라며 자문인 듯 질문인 듯 중얼거렸다.
생각이 많아서 그래요, 다시 앨런의 깐죽이 시작된다, 여자들은 생각이 많죠... 이런 식의 성적 일반화에 대하여 이번에는 낸시가 발끈한다, 독창적인 발언 하곤! 이 말을 이어받아 페넬로피가 따지기 시작했다. 생각이 많은 게 대체 뭐죠? 세상을 도덕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어떻게 살 수 있는지 납득이 안돼요. 마이클이 농담 조로 툭 던진다, 나 봐, 잘 살잖아~ 발끈하는 페넬로피, 당신은 입 다물어! 웃자고 한 얘기라는 말에 페넬로피가 쏘아붙인다, 난 유머 감각도 없고 그러기도 싫어! 이제 마이클이 본격적으로 나섰다, 부부와 가족은 신이 내린 가장 가혹한 시련이죠. 이 말에 낸시가 자기 부부는 빼 달라며 아주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반박한다. 이어서 에단 이빨 부러진 게 부부 생활이란 무슨 관계냐며 남편에게 동의를 요청했지만 앨런은 관련이 있다면서 그 요청을 가볍게 뿌리친다. 이제 전선은 명확하게 남과 여로 그어진다. 아이의 문제와 부부의 문제가 관련이 있다는 남자들과 무슨 관계냐는 여자들, 마이클의 신박한 논거, 아이들은 실컷 부모 피를 빨아먹고 껍데기만 남겨 둔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다, 더 나아가서 마이클은 자신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앨런에게 시가까지 권하며 집안에서의 흡연을 반대하는 페넬로피의 속을 더 긁어댄다. 위스키에 이어 시가의 맛을 과장해서 칭찬하며 마이클에 동조하던 앨런에게 또 전화가 걸려 온다. 다시 대화가 끊기고 앨런이 전화로 재판 관련 코칭을 하는 동안 이번에는 낸시의 한탄이 이어진다, 맨날 이래요, 핸드폰이 삶을 토막 내죠, 집 밖의 일은 언제나 더 중요해요, 길에서도, 저녁 먹을 때도, 아무데서나 저러고 있죠. 이제 더 이상 싸우지도 않아요, 전 완전히 항복했어요. 전화를 끊은 앨런이 낸시에게 괜찮냐고 물어보자 짜증이 난 낸시는 신경 써 줘서 감동이라며 남편을 비꼬았다. 이에 앨런은 이분들 결혼 생활이 엉망이라고 해서 우리까지 이럴 필요가 없쟎냐고 한다. 이 깐죽거림에 발끈한 페넬로피, 무슨 권리로 우리 결혼 생활을 재단하죠? 이때 또 걸려온 앨런의 전화, 더 심하게 얼굴이 일그러지는 페넬로피, 앨런이 다시 건다고 전화를 끊고는 마이클의 말을 인용한 것뿐이라고 응수하며 자신의 가족을 재단하지 말라는 말에는 우리 아들도 재단하지 말라고 맞받아친다. 당신 애가 우리 애를 때렸어요! 애들이잖소, 애들은 원래 그래요, 자연의 법칙입니다. 아니라고 부정하는 페넬로피에 맞서 앨런은 말을 이어간다, 맞아요, 교육이 자연의 법칙을 대체할 때까지, 법 자체도 아시겠지만 폭력이 근원입니다. 다시 발끈하는 페넬로피, 원시인이라면 모르겠지만 문명화된 여기서는 아니에요! 여기요? 앨런은 섞소를 지으며 페넬로피에게 다가와서 진지하게 말한다, 전 '대학살의 신'을 믿어요, 태곳적부터 군림해온 그 신이요, 아프리카에 관심이 있댔죠? 그러면서 자신이 콩고에 다녀온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곳에서는 어린애들이 8살 때부터 칼과 총, 칼라쉬에 텀퍼까지 들고 살인을 배운다면서 거기에 비하면 자신의 애가 나무 막대기로 다른 애 이 두 개를 다치게 했어도 자신은 페넬로피처럼 그렇게 놀라지 않을 거라고 한다. 앨런의 비유를 다큐로 받아들이는 페넬로피는 연민의 눈물을 그렁이며 애절하게 말한다, 아프리카 얘긴 아무것도 아니야, 전 아프리카의 수난을 너무 잘 알아요, 몇 달 동안 그 생각만 했다고요. 마이클이 나서서 제발 아프리카 이야기는 하지 말란다, 이에 역정을 내며 남편을 때리는 페넬로피, 여긴 아프리카가 아니라 뉴욕이라고요, 서구 사회의 관습이 지배하는, 브루클린의 사건은 여기 일이라고요, 그러니 서구 관습과 상관있죠, 당신이 아프리카든 뭐라든 전 지킬 거고요. 남편 때리는 것도 관습인가? 이번엔 마이클의 깐족거림... 경고한다, 마이클! 화가 치민 페넬로피의 날카로운 반응, 완전히 마이클을 쥐 잡듯 한다며 키득거리는 앨런, 우리 남편분 같이 잘 나가는 파워맨께는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이 하찮을 수밖에요, 앨런을 깎아내리는 낸시, 낸시의 이런 비꼼을 자기의 근거로 삼으며 그게 당연하다는 앨런, 이런 개인주의에 또 반론을 펼치는 페넬로피, 난 정말 모르겠네요, 우린 다 같은 지구인인데 왜 공동체를 못 이루죠? 반복되는 페넬로피의 이런 주장에 화가 난 마이클, 고상한 소린 집어치워! 이때 또 울리는 앨런의 전화...
이제 참을 만큼 참은 페넬로피가 코원씨, 사람 미치게 하는 그 전화 좀 그만 두시죠? 그러고는 낸시가 벌떡 일어서더니 남편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아 튤립이 담긴 꽃병에 빠뜨려 버린다. 순간의 정적... 앨런은 기가 차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마이클이 오 마이 갓을 외치며 폰을 꺼냈을 때 페넬로피는 환호성을 질렀다. 마이클과 앨런은 폰을 들고 배터리를 분리해서 드라이기로 말리려고 안달인 동안 두 여자는 신이 나서 미친 듯 웃고만 있다. 마이클이 드라이기로 폰을 말리는 동안 앨런은 자신의 모든 것이 새로 장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폰에 들어있다며, 이제 자기 인생은 끝났다면서 거실 바닥에 철퍼덕 퍼질러 앉아 망연자실해하고 있다. 미친 듯이 웃고 있는 페넬로피를 보며 마이클은 이게 웃겨? 웃기냐고! 라며 화를 냈지만 페넬로피는 오히려 우리 남편은 온종일 말리기만 하네라고 비꼬며 낸시와 함께 더 깔깔거린다. 사실, 낸시가 앨런의 폰을 빼앗아 화병에 버리는 순간은 관객들도 유쾌, 상쾌, 통쾌의 전율을 은근히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결국 전화기 말리기에 실패한 남자들이 망연자실한 채 앉아있는 동안 여자들의 반격이 시작된다. 거나하게 취기가 올라온 낸시는 남자들의 여성 일반화에 맞서 남성 일반화를 시도한다. 남자들은 자기 장난감에 엄청 집착한다며 예전 데이트했던 한 남자가 어깨끈 달린 남자 가방을 들고 온 적이 있다며 깔깔거린다. 게다가 핸드폰은 늘 손에 쥐고 있어야 하고, 최악이라면서 남자란 손이 자유로워야 한다며 서로 맞장구친다. 마이클과 앨런이 추켜 세우던 남성들의 우상 존 웨인을 차용하여 여성들만의 존 웨인식 남성상을 이야기한다, 항상 뭘 들었더라? 콜트 45구경! 그래, 방 안을 싹쓸이하는 총, 외로움을 풍기는 남자라야 진짜지! 그러고는 마이클을 비꼰다, 마이클, 이제 행복하시겠어요, 말랑말랑한 얘기는 이제 다 파토가 났잖아요. 맞장구치는 페넬로피를 향해 사람들 앞에서 취했다고 핀잔을 주면서 마이클은 이런 여성 연대에 맞서 숨겨둔 고급 시가를 꺼내서 앨런과 함께 보란 듯 허세를 부린다. 다시 마이클의 엄마에게 전화가 왔고 이번에는 마이클이 앨런에게 전화기를 넘겨주며 앨런이 변호하고 있던 회사의 문제의 약을 먹지 말라고 말을 하게 했다.
이제 정리가 좀 된 듯하다. 낸시가 마무리를 시도한다, 이제 그만할까요? 저녁에 재커리랑 다시 올까요? 이것 때문에 온 건데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페넬로피가 속이 안 좋다며 비틀거린다, 이미 취한 페넬로피는 남편의 만류에도 술을 또 따른다. 낸시가 그래도 덜 추한 마무리를 위하여 말을 잇는다, 우리 양쪽 다 문제가 있어요. 하지만 이 말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페넬로피, 자식 문제가 언급되자 다시 상황은 극단적인 女 vs 女 전선으로 바뀐다. 지금 장난해요? 애가 아침마다 진통제 두 알씩 먹는데 양쪽 다 문제라고요? 빡 돌아버린 페넬로피의 말에 냉정하게 대답하는 낸시, 그렇다고 애가 착한 건 아니죠. 진즉에 뚜껑이 열려버렸던 페넬로피는 이 말에 참지 못하고 자신의 집에서 나가라며 낸시의 가방을 던져 버린다. 가방 안에서 화장품이며 향수며 손장갑이 우수수 떨어진다. 내 가방, 내 가방! 뛰쳐 가서 가방과 떨어진 내용물들을 주섬주섬 주워 담던 낸시는 자신이 뭘 어쨌냐며 화를 낸다. 어떻게 마무리되든 책임의 소재는, 옳고 그름은 분명히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뭉친 페넬로피가 소리친다, 책임을 나누자고? 범죄자와 피해자는 엄연히 달라요! 범죄자래! 자신의 아이가 범죄자로 둔갑된 상황에 어이없어하는 낸시... 마이클은 이 말이 심했다고 느꼈는지 페넬로피를 긁어댄다, 제발 그만해, 정치적으로 옳은 척 그만하라고! 수단 깜둥이들 문제에 환장하다 보니 이젠 모든 게 그런 식이야! 남편의 직설적인 표현에 당황한 페넬로피, 감히 어찌 그런 말을... 그러고 싶으니까, 터놓고 야비하고 싶으니까! 낸시는 그만 나가자면서도 술은 또 따른다. 만류하는 앨런에게 꽐라가 될 때까지 계속 마실 거라 고집을 부린다, 우리 애보고 범죄자라는데 가만있을 거야? 우린 잘 해결하려고 왔는데 우릴 모욕하고 협박하질 않나, 올바른 지구인이 돼라 훈계하지 않나, 이제 낸시는 참아왔던 말을 후련하게 내뱉어 버렸다, 우리 애가 그쪽 애 패서 정말 속이 후련해! 당신들 권리든 뭐든 내 엉덩이나 닦으라고 해! 마이클은 이제야 자신의 편을 제대로 찾았다, 술 한잔 하더니 본모습이 나오는군, 우아하고 고상한 여인은 어디로 가셨나? 얼씨구나 하며 페넬로피가 동조한다, 내가 말했잖아 완전 가식 덩어리라고... 자신의 아내에 대한 롱스트릿 부부의 이런 재단에 가만히 있을 리 없는 앨런, 겨우 15분 만나고 그걸 알아요? 그런 건 빨리 아는 편이죠. 가식이라뇨? 말리는 낸시를 가로막고 앨런이 반문한다. 격분한 페넬로피는 완전 겉치레라며 낸시는 앨런보다 더 신경 쓰지 않는다고 소리 지른다. 마이클도 동조한다, 저들은 신경 안 써! 처음부터 그랬다고, 부인도 신경 안 쓴다니까! 섞소를 띄며 앨런이 마이클에게 반문한다, 그러는 당신은요? 당신은 어떻게 신경 쓰는데요? 똑 부러지게 들이밀 답이 없었기에 마이클이 그냥 입만 벙긋하고 있을 때 앨런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터놓고 야비할 때가 차라리 믿을 만해요, 모두가 그래요, 페넬로피 빼고는 사실 그 누구도 신경 안 써요, 그녀가 정직한 건 인정하니까... 페넬로피의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지고 목소리는 히스테릭한 하이톤으로 이미 바뀌었다. 당신 인정 필요 없어요, 필요 없다고! 옆에서 자신도 신경 쓴다고 항변하는 낸시를 달래며 앨런은 단순히 히스테리 부리는 그런 식의 신경을 쓰는 거지 사회 운동하는 영웅처럼 그런 것이 아니라고 페넬로피를 돌려서 까더니 이번에는 직설적으로 말을 내뱉는다, 당장 KKK 포스터를 사고 싶다던 제인 폰다를 페넬로피의 친구라고 하며 같은 종족으로 단정해 버린다. 같은 종족이란 말이죠, 문제에 개입하고 해결하는... 그러고는 씨익 웃으며 하는 말, 우린 섹시하고 호르몬 넘치는 여자가 좋아요, 자기 통찰력을 자랑하는 세상의 지킴이들... 확 깨죠, 심지어 당신 남편도 확 깼을 걸요? 완전히 미쳐버릴 듯한 표정의 페넬로피, 화가 머리를 뚫고 나와 화산처럼 폭발해서 고래고래 소릴 지른다, 당신 여성 취향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요, 어떻게 그렇게 지껄일 수가 있죠? 당신 헛소리엔 누구도 신경 안 써요! 여전히 차분하게 조근조근 깐죽이는 앨런, 소릴 잘 지르시네요, 마치 노예 선박 지휘관처럼... 앨런의 이런 신경전에 완전히 말려버린 페넬로피는 이제 막 나간다, 낸시를 가리키며 저 여자도 소릴 지르던데? 못된 당신네 애가 우리 애를 잘 팼다고! 이에 질세라 낸시도 막 나간다, 우리 애가 잘한 거죠, 적어도 우리 애는 나약한 호모는 아니니까! 페넬로피가 발악을 한다, 당신 애는 빌어먹을 고자질쟁이야! 비틀거리며 낸시가 나가자고 일어선다, 대체 왜 여기 아직까지 있는 거야? 잘 봐요, 튤립 웃기고 있네! 낸시는 화병에 꽂힌 튤립 뭉텅이를 뽑아선 미친 듯 아래위로 쳐서 탁자며 거실 바닥에 다 흩뜨려버린다. 끔찍한 꽃 같으니! 내 인생 최악의 날이야, 그러고는 꺼억 트럼을 한다. 잠깐 동안의 정적... 이때 탁자 위에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것 같았던 앨런의 폰이 또 울린다.
다시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공원 놀이터, 마이클이 버렸다던 햄스터는 낸시의 걱정과는 다르게 건강하게 살아 있다. 이 햄스터를 중심으로 화면은 줌-아웃되며 카메라는 영화의 처음 도입부처럼 공원을 원경으로 잡는다. 화면에는 두 아이, 재커리와 에단이 언제 싸웠냐는 듯 어깨를 맞대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이들은 아이들이듯, 어른들의 세계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다투기도 하고 알아서 화해하고 그렇게 서로 몸을 부대끼며 성장해간다는 것을 보여주듯 카메라는 담담하게 아이들의 그런 일상을 그리고 있다. 이렇게 재커리와 이턴의 다정한 모습을 줌-아웃하며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영화 <대학살의 신>의 줄거리다. 사실 말이 줄거리지 서사적 요소는 거의 없고 튀어 올라 허공을 가르는 팝콘처럼 멋대로 날뛰는, 넘쳐흐르는 말들의 향연뿐이다. 물론, 뒤에 이어질 논의를 위하여 이 향연을 다소 자세하게 기술한 면이 없지 않다. 줄거리 같지 않은 줄거리를 통해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이 영화는 단지 네 명의 배우가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오로지 주고받는 설전을 통해서만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본다면 연극판에 훨씬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 것이다. 실제로 야스미나 레자의 원작 "대학살의 신"은 연극을 위한 희곡이며 그렇기에 연극으로 많이 공연되고 있다. 이렇게 영화로 옮기기엔 극적인 요소나 스토리가 거의 없는, 연극에 딱 맞는 작품을 로만 폴란스키(이 양반이 저지른 용서받지 못할 만행은 여기서는 언급 않기로 하고 오롯이 작품에 대해서만 언급할 것이다.)는 조디 포스터와 케이트 윈슬릿, 존 C. 와일리와 크리스토퍼 왈츠 네 명의 연기 장인들을 내세워 아무런 어색함이 없는 영화로 훌륭하게 연출을 해냈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 대한 평단의 평가는 나쁠 수가 없을 것이며 일반 관객들의 평가도 좋다. 그리고 평가의 대부분은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설전,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지는 모습을 통해 가식과 위선이 벗겨지며 드러나는 민낯,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 안의 다른 모습 등등이다. 이렇듯 이 영화에 대한 전형적인 평가는 어른들의 유치한 말싸움의 극단을 통해 인간의 가식과 위선을 까발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며 물론 그렇기에 이 영화의 진가가 제대로 드러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전형적인 평가와는 다르게 필자의 경우 이 영화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시도해 보고자 영화의 줄거리를 이루는 거침없고 날 선 이 수많은 대화들을 다소 자세하게 그려냈다.
어른들의 유치한 설전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과정에서 위선과 가식을 무장해제시키고 발가벗겨 종국에는 인간 본연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는 통쾌함을 선사하는 영화... 하지만 이런 전형적인 평가에는 은연중에 어떤 도덕적 가치 판단이 깔려 있다. 위선, 가식, 민낯... 이런 단어에는 이미 부정적 가치 판단이 내재되어 있으며 본심-진실을 감추고 아닌 척 거짓의 가면을 이미 쓰고 있음을 전제한다. 하지만 이런 가치 판단의 이면에는 거짓의 가면을 걷어 낸다면, 아니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의, 본연의 모습으로 서로 다가간다면 영화에서처럼 그런 최악의 상황으로 나가지 않을 거라는 어떤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믿음은 말 그대로 합리적이고 투명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신념에 근거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이런 위선이나 가식은 필수 불가결하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런 가면들을 통해서 서로의 감정이 극에 다다르지 않고 서로 타협하는 어느 선에서의 적절한 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는 가면을 쓰기 마련이고 이 가면이 위선이나 가식이라면 그것은 결코 나쁜 의미의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니, 차라리 그런 위선과 가식, 몇 겹의 가면들을 끝까지 벗어던져 버리게 만드는 기저의 어떤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끊임없이 말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설전, 처음에 두 커플은 이런 결말을 예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말 그대로 교양 있는 문명인답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화로 문제를 풀고자 만났을 것이며 여기에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페넬로피의 말대로 당장 고소를 하는 등의 극단적 상황은 피해야 하기에... 하지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대화를 시도하면 할수록 양파 껍질이 벗겨지듯 가면은 한 꺼풀씩 차례대로 벗겨지며 상황은 비이성적이며 몰상식한 방향으로 악화되어 종국에는 피하고자 했던 극단으로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합리적이고 투명한 의사소통에 대한 믿음은 그냥 믿음으로 머물고 만다.
"합리적이고 투명한 의사소통"이라는 이 표현은 자연스레 현대 이성 철학의 거두인 독일의 하버마스를 떠올리게 한다. 하버마스는 자신의 저서 "의사소통 행위 이론"을 통해서 해방적 의사소통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 이성의 개념을 재구성하여 현대에 있어서의 합리성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그의 이론적 체계는 현대 사회 제도 안에서, 이성적인 관심사를 갖고 토론할 수 있는 인간의 수용 능력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이성적이고 비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잠재력과 이성, 더 나아가서는 정치적 해방에 대해 밝혀내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이론 체계의 내심의 목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것은 포스트 모던이나 구조주의 또는 해체 철학이 수행했던 인간 이성에 대한 수 많은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가 끝까지 이성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고 부여잡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수많은 방대한 저서를 통하여 전개되는 그의 이론은 상당히 난해하고 복잡해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이성에 대한 낙관적 신뢰가 흐르고 있다. 어찌 보면 그것은 막연한 믿음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그는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이고 투명한 의사소통이 가능함을 종국적으로 역설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성에 대한 이런 막연하고도 절대적인 믿음, 이것을 바탕으로 구축된 거대한 서구 이성 철학의 시작은 플라톤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의 저서 <다이얼로그>를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말들이 있다. 비례, 조화, 변증법, 논리, 이성... 단순하고 절대적인 것들에 대한 열망으로 표현되는 이데아! 우연과 혼돈, 생성과 소멸, 운동과 변화를 거부하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실재와 그것들의 조화로운 배치와 비례에 의해 표현되는 절대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이것들과 직결되는 절대선, 불순물이 다 제거된 순수하고 단일한 실제. 이런 아름다운 개념들을 떠올리게 하는 플라톤의 <다이얼로그>를 이용하여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이고 투명한 대화의 가능성을 반대로 그저 가능성으로 머물게 만드는 글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그 글은 과학과 철학, 예술을 넘나들며 통섭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했던 프랑스 철학자 미셸 세르의 방대한 저서 <헤르메스> 5부작에 실린 <플라토닉 다이얼로그>란 글이다. 학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세르답게 그는 여섯 페이지 남짓한 이 글에서 현대 과학의 첨단을 걷고 있는 통신 이론을 도입해서 하버마스가 믿고 있는 투명한 대화나 합리적인 의사소통 가능성의 한계를 보여 준다.
먼저, 낯설겠지만 통신 이론을 간단히 소개해야만 하겠다. "통신(Communication)"이라는 것은 아주 광범위한 개념이지만 기술적 개념으로 한정한다면 정보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축소시킬 수 있다. 정보란 개념 자체도 정보이론의 측면에서 한정시켜 보자면 ‘불확실성의 포함 정도’로 간주할 수 있다. 정보이론에서의 엔트로피 개념은 불확실성의 척도로서 불확실성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보량은 큰 것으로 간주된다. 이 말은 곧 정보는 확률과 반비례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자연스레 확률이론도 따라 나온다. 정보이론에서는 확률이론이 필수적인데 왜 그럴까? 오래전에 "나 자기 끔찍이 사랑해"라는 무선 전화 내용이 "나 자기 끔찍해"로 바뀌는 디지털 무선전화기 TV 광고가 있었다. 이 광고에서처럼 사랑의 표현이 사랑의 거부로 나타나게 하는 요인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잡음(Noise)이다. 잡음은 간단하게(세르가 언급한 그대로) "통신에 장애가 되는 간섭 현상들의 집합"이라고 정의된다. 통신 과정을 기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기본적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송신단] - [채널] - [수신단]이 그것이다. 문제는 이 모든 부분에 다양한 형태의 잡음이 섞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신호의 왜곡, 감쇄, 지연, 간섭뿐만 아니라 특히 채널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열잡음(이 잡음을 수학적으로 표현한 것을 백색 잡음(White Noise)이라고 한다.)이 있다. 잡음에 대한 면역성이 강하기 때문에 아날로그 통신에서 디지털 통신으로 바뀌고 있지만 이 디지털 통신 역시 아날로그 통신에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잡음들과 공존해야만 한다. 그리고 여전히 백색 잡음은 필수적인데, 아날로그든 디지털이든 통신이 가능하려면 필히 채널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잡음은 필수적이지만 그 발생은 우연적이다. 송신단에서 s(t)란 신호를 보내면 채널에 존재하는 잡음 n(t)가 섞여 수신단에서는 r(t) = s(t) + n(t)라는 잡음이 들어온다. 수신단에서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이 n(t)를 제거하고 순수한 s(t)를 복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수신단에서의 잡음 제거 역시 철저하게 확률적이다. 디지털 통신의 경우 수신단에서는 결정이론(Decision Theory)에 따라 잡음 속에서 1 또는 0을 확률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다른 잡음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채널에서의 백색 잡음은 철저하게 우연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그 잡음에 대한 해석과 모델링도 확률이론(이 백색 잡음의 해석은 바로 불확정성의 원리-슈뢰딩거 방정식으로 표현되는 양자 역학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에 의존하게 된다. 바로 이 잡음 때문에 정보이론과 코딩 이론이라는 수학의 새로운 분야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잡음은 필연적인 동시에 우연적이다. 그리고 통신 이론의 목표는 바로 잡음을 제거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세르의 텍스트는 통신 이론을 모델로 해서 바로 이 잡음을 자신의 스타일로 모델링하면서 시작한다. 우리가 대화하거나 통신을 할 때 통신의 수단으로써, 즉 메시지의 형태로서 말이나 문자를 포함한 다양한 통신 체계들을 사용한다. 문자는 어떤 패턴을 가진, 전형적인 그림이다. 글을 쓴 사람과 쓰인 그 글을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글을 쓰게 되면 그 글을 인식하게 하는 필수적인 그래픽 기호(의미를 담지한)가 존재한다. 동시에 우연적이면서 부차적인 요소로서 오자라든지 알아보기 힘든 글씨도 함께 존재한다. 아니, 우리가 매번 글을 쓸 때마다 글의 모양은 조금씩 차이가 난다(소쉬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경우의 차이는 파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시각적 요소 없이 순전히 청각에만 기대는 말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글의 필연적인 부분과 우연적인 부분 - 만약 그 정도가 매우 심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미를 이해한다. 그러나 그 차이 - 문자에서의 악필, 오자, 소리에서의 말더듬이나 틀린 발화, 사투리 등등, 그리고 시간과 공간에 따른 차이 - 는 언제나 존재한다. 바로 그런 차이들의 필연성과 우연성이 공존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화를 한다. 독백이 아니라면 대화는 쌍방을 전제한다, 바로 발화자와 청취자. 그들 사이의 대화에는 주고받는 메시지가 있으며 이것은 수학적 표현으로서의 '정보' 또는 일상적 표현으로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목표는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게 하여 대화나 통신을 성공적으로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그 차이들에 의해 우리의 대화는 왜곡되고 실패하게 된다. 이런 정보나 의미의 교환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차이들이다. 이러한 차이들을 잡음이라고 하자. 그러면 통신 이론에서의 모델이 그대로 드러난다. 송신단이 있고 수신단이 있으며 그 사이에 채널이 있다. 그 채널을 따라 움직이는 메시지나 코드가 있고 채널에 존재하면서 언제나 그 메시지를 방해하는 잡음이 있다. 이러한 모델을 세르는 아래와 같은 기하학적 다이어그램으로 모델링한다.
대화의 두 당사자가 있고 그 사이에는 그들을 연결하는 채널이 수평 대각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 채널을 자르는, 그들의 레퍼토리나 코드를 가로막는 또 다른 하나의 수직 대각선이 있고 그 위쪽 극에는 잡음이 위치한다. 잡음과 함께 연결된 코드나 레퍼토리는 언제나 잡음과 함께 있어야만 하는 동시에 잡음에 의해서 방해를 받는다. 통신의 목적이 잡음의 제거이듯 이제 이 대화자들 사이의 목표가 뚜렷해진다. 플라톤의 대화에서는 서로 대립되는 두 사람이 논쟁을 벌인다. 플라톤의 다이얼로그의 목표는 산파술에 의해 논의 상대방과 합의점을 도출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플라톤이 말하는 대화이고 변증법이다. 그러나 통신 이론의 모델에서 보게 되면 플라톤의 대화는 처음에는 서로 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이 대화의 쌍방이 결국 상호 연합을 통해서 "공동의 적"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 "적(敵)"은 이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너도 나도 아닌 제3의 인물, 잡음의 의인화된 표현으로서의 "악마"다. 이제 목표는 이 악마를 제거하는 것이다. 세르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통신은 간섭과 혼란의 현상, 또는 대화에 끼어드는 어떤 사람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한 두 대화자에 의해 수행되는 게임의 일종이다." 이 대화자들은 전통적인 변증법적 게임의 개념에서 상호 대립물이 아니라 반대로 상호 이해에 의해 묶인 같은 편이다. 그들은 잡음에 대항하여 함께 투쟁한다. 플라톤의 대화의 핵심은 타자(the Other)-이것은 단지 동일성의 다양한 양태일 뿐이다-의 문제가 아니라 악마로 의인화된 이 제삼자의 문제이다. "(플라톤적인) 대화를 한다는 것은 제 삼의 인물을 상정하고 그를 제거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라고 세르는 결론짓는다. 변증법은 바로 이 대화자들을 함께 묶어주고 그들이 동의할 수 있는 진리를 생산하기 위해, 그래서 성공적인 통신을 성사시키기 위해 투쟁하게 하는데 그 투쟁의 대상이 바로 제 삼의 인물 - 악마가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잡음을 배제하고 코드를 아우르는 과정이다. 그 속에서 차이는 제거되고 너와 나 사이에 맺어진 진리만이 남게 된다. 이렇게 통신은 성공적으로 끝난다.
물론 이러한 관계는 말로 이루어지는 대화뿐만 아니라 글을 매개로 하는 정보 교환, 글 쓴 이와 읽는 이 사이의 관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플라톤적인 대화의 과정 - 잡음을 제거하는 과정을 다시 고려해보자. 잡음을 제거하면 남는 것은? 논리학자와 문자의 관계로 돌아가 보자. 논리학자들의 논리화는 문자가 그림으로 표현되는 이런저런 차이, 칠판 여기저기에 그려져 있는 문자의 시간적, 공간적 구체성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형태를 간직한 대상들의 묶음을 이용하는 것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문자가 유발하는 추상적 존재, 그것이 바로 기호(Symbol)다(여기서의 차이는 소쉬르의 관점에서 볼 때, 파롤에 의한 차이이지 기표로 하여금 가치를 지니게 하는 차이는 아니다. 또한 그러한 파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남는 동일성은, 즉 이 텍스트에서 말하는 추상적 실재는 인간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하나의 대표, 청각 영상과 개념의 결합으로서의 랑그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문자들의 구체적 차이,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절대적 실재, 모든 불순물, 잡음이 제거되고, 정련된 후에 남는 형식이다. 그러면 이제 세르가 의도하는 바는 짐작 가능하다. 바로 이 절대적 실재(형식)가 이데아이다. 악필이나 오자, 잡음을 제거하는 것은 동시에 이러한 추상적 형태의 이해의 조건인 동시에 통신(대화)의 성공의 조건이다. 이러한 추상화의 대표적 분야를 뽑으라면 수학은 도망갈 길이 없다. 데카르트의 대수적 기호화는 물론이고 힐버트의 극단적 형식주의는 자세히 논할 필요 없이 그 이름만 드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공식화한다는 것은 사고의 구체적인 다양한 방식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나 그 이상의 추상적 형태에 이르는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최적의 방법으로 잡음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세르는 강조한다.
여기에서 세르는 수학과 플라톤의 이상주의의 담합의 근거를 찾는다. 플라톤의 대화는 완벽하다. 그것은 추상적 형태의 인식과 대화의 성공의 문제를 공존 가능하게 한다. 내가 침대라고 말할 때 이런저런 구체적인 침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침대의 이데아를 불러내는 것이고, 내가 모래 위에 사각형과 원을 그릴 때, 이렇게 저렇게 삐뚤게 그려진 도형이 아니라 원과 사각형의 절대적 형태를 그리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엄격하면서 진리이고 동시에 보편적인 과학을 가능하게 하고, 보편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한다. 구체성 - 이런저런 구체성은 제거되고 남는 것은 추상적, 보편적 존재뿐이다. 구체성은 그저 잡음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구체성이라는 이 잡음의 제거는 바로 경험적인 것의 제거를 의미한다. 대화에서 통신의 성공을 가능하게 하는 첫 번째 시도는 형식을 경험적 실재화에서 독립시키는 시도다. 추상화, 형식화의 과정은 경험을 제거하고 철저한 연역에 의한, 논증에 의한, 논리에 의한 대화를 의미한다(경험적 요소와 합리적 요소의 이러한 대립은 현대 수학사에서도 다시 재현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힐버트의 <형식주의>와 브로우어의 <직관주의>의 대결이었다.). 현대의 논리학자들은 언제나 플라톤과 함께 하고 있다. 경험을 배제하는 것은 차이와 동일성의 가면을 쓰고 있는 다양성을 제거하는 것이며, 동시에 수학화와 형식화(공식화)를 향한 첫 발걸음이다. 플라톤의 대화의 변증법은 수학적 방법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 그리고 그러한 수학적 방법 역시 변증법적이다(그리스 시대의 수학을 이전 시대의 수학과 구분 짓게 하는 가장 큰 특징은 경험적 요소를 배제한 철저한 연역에 의한 논증의 확립이다. 그리고 그러한 수학적 논증은 바로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 철학에 내재하는 기하학의 방법에 의한 추상적 이상화의 점진적 발전과 변증법 사이의 연계는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대상의 본성에 각인되어 있었다.
여기까지 도달한 독자라면 왜 필자가 세르의 <플라토닉 다이얼로그>를 소개했는지 짐작을 할 것이다. 세르의 이 글은 영화 <대학살의 신>을 그저 위선, 가식, 민낯 등의 단어가 주가 되는 해석이 아니라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이고 투명한 의사소통의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아이들 사이에 발생한 문제를 두고 두 커플은 앞서 언급했던 대로 "교양 있는 문명인답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화로 문제를 풀고자" 만났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그저 서로의 민낯만 드러낸 채 파국을 맞이했다. 왜 그랬을까? 이 지점에서의 답은 자연스레 "잡음"이 될 것이다. 두 쌍의 부부가, 그것도 서로 크로스를 해가면서 적대적 대화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대화의 채널을 타고 전달될 의미가 왜곡되거나 곡해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발화된 말의 의미가 상대방에게 의도치 않게 해석되어 버리는 이러한 왜곡의 원인은 바로 차이다. 개개인의 성격의 차이, 서로 살아온 환경의 차이, 직업상의 차이, 경제적 지위에 따른 차이 등등에 의해 의미는 왜곡된다. 시시비비는 명확하게 가리고자 하는 페넬로피의 입장에서 사용된 직설적 표현에 변호사를 업으로 하는 앨런은 발끈할 수밖에 없다. 설치류를 무서워하는 마이클이 버린 햄스터에 무한 동정을 느끼는 낸시는 마이클을 당연히 비난할 것이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진보인척 해야만 했던 마이클의 폭발은 페넬로피에게는 그저 배신일 뿐이다. 페넬로피의 경직된 PC에 맞서는 앨런의 깐죽거림은 그저 앨런스러울 뿐이지만 페넬로피에게는 비꼼이 된다. 직업적 특성상 전화를 달고 살아야 하는 앨런에게 그동안 참아왔던 분노를 표출하는 낸시는 그게 낸시인 것이다. 마지막까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시시비비를 따지는 피넬로피나 그런 피넬로피에게 막 나가는 낸시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런 다양한 입장의 차이들이 의도치 않은 말의 왜곡을 만들어 내어 청자에게 그 의미를 닿지 못하게 하는 잡음이 된다. 그렇기에 의도했던 이성적 합의, 투명한 대화는 이러한 잡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실패로 귀결될 것이다. 영화 <대학살의 신>이 보여주는 것은 믿음으로서의 이성이 아니라 존재로서의 잡음이다. 그리고 세르의 논거는 투명한 대화의 가능성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투명한 대화라는 가능성을 가능성 그 자체로 한계 짓는 것이리라. 다시 말해, 투명한 대화는 커뮤니케이션이 귀결될 수 있는 여러 양태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세르는 잡음의 존재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