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의 개명
언니, 오빠는 어릴 적부터 이름이 불만이었다. 오빠는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고, 언니는 잘못 발음하면 분위기가 어색해질 수 있는 이름이다. 주위 사람들이 두 이름을 듣고 “응?”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져야만 하는 직업을 가진 오빠는 이제 자기 이름에 만족한다. 언니는 아니다. 계속 개명을 고민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기업에 취직하면서 점점 이름을 바꾸기 어려워졌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이름이 박제됐기 때문이다. 명함에 박힌 이름을 고치기란 쉽지 않다. 24년차 회사원이라면 더욱.
이제는 한유섬이 된 한동민, 등번호까지 바꿔
야구선수는 오죽할까. 한해 한해 활약이 활자로 기록으로 남는데, 이름을 바꾼다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도 KBO리그 출범 이후 2020년까지 개명한 선수는 85명에 이른다.
올해는 대표적으로 한유섬(32·사진 왼쪽)이 결단을 내렸다. 한유섬? 처음 듣는다고? 신세계 야구단 외야수 한동민의 새 이름이 ‘한유섬’이다.
유튜브 등에 ‘한동민’을 검색하면 2018년 플레이오프 5차전 연장 10회말 끝내기 홈런 장면이 나온다. 에스케이(SK) 와이번스(현 신세계 야구단) 구단 공식 채널인 ‘슼튜브’에서만 이 장면은 27만 회 재생됐다. 정우영 SBS스포츠 아나운서가 목이 터져라 “굿바이, 굿바이, 굿바이”를 외친 뒤 “한동민이 넥센(현 키움) 히어로즈에 작별을 고합니다”라고 말한다. 야구팬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한국야구사 한 페이지를 장식한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했던 그인데, ‘한동민’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없다. 덩달아 ‘동미니칸’(동민+도미니카)이라는 별명도 사라진다.
이유는 있다. 2019시즌과 2020시즌에 너무 부진했다. 2019시즌에는 12홈런밖에 치지 못했다. 2020시즌에는 오른 정강이, 왼쪽 엄지손가락 부상이 이어지면서 62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는 고민 끝에 이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작명소에서 이름을 받아 왔지만 이후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기 위해” 31년 가까이 불렸던 이름을 버리기로 했다. 등번호까지 62번에서 35번으로 바꿨다. 야구단 주인도 에스케이에서 신세계로 달라졌으니 그의 야구 인생은 완전히 터닝포인트를 맞은 셈이다.
한유섬에 앞서 손아섭, 강로한, 장시환, 최원준, 진해수, 오주원, 김세현, 배정대 등이 이름을 바꿨다. 한유섬의 팀 동료인 오태곤도 예전에는 ‘오승택’으로 불렸다.
개명하고 스타 플레이어로 발돋움한 손아섭
개명한 뒤 가장 잘 풀린 선수는 롯데 자이언츠 손아섭(33·사진 오른쪽)이다. 손아섭은 2008시즌 직후 ‘손광민’에서 ‘손아섭’으로 개명했다. 이후 2009년에는 부진했으나 2010년부터 풀타임 주전으로 활약하면서 스타 플레이어로 발돋움했다.
‘손광민’일 때 그의 성적(2007~2008시즌)은 타율 0.147(224타수 33안타) 3홈런 2도루에 불과했다. 하지만 ‘손아섭’일 때 그의 성적(2009~2020시즌)은 타율 0.332, 159홈런 813도루에 이른다. 이름처럼 아주 다른 선수가 됐다. 이런 성적을 바탕으로 2017년 말 롯데와 98억원(4년) 계약을 했고 2021년이 마지막 계약 시즌이다. 부상만 없다면 또 다른 ‘대박’이 예상된다. 작명소에서 “야구로 성공할 이름”이라고 했다는데 맞는 것 같다.
배정대(KT 위즈)도 2014년 ‘배병옥’으로 프로 입단 뒤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하지만 경찰 야구단에서 뛰며 2018년 말 개명했고 ‘배정대’로 뛴 두 번째 시즌(2020년)에서 전 경기(144경기)를 소화하면서 타율 0.289, 13홈런 63타점 88득점의 성적을 남겼다. ‘배정대’라는 이름을 확실히 각인하는 활약이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도 이름을 바꾼 사례가 더러 있다. 물론 이유는 다르다. 동서양의 문화 차이랄까. 2008년 빅리그에 데뷔한 베네수엘라 출신의 펠리페 리베로는 2018시즌 직전 펠리페 바스케스로 등록명을 바꿨다. 2017년 말 피츠버그와 4년 2200만달러의 연장계약을 하는 데 여동생(프레실라 바스케스 코스메)이 큰 역할을 해준 것에 고마운 마음에서 이름을 공유했다. 하지만 바스케스는 이후 아동 성범죄 혐의 등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추신수와 한때 한솥밥을 먹었고 2007년 사이영상 투표 4위에도 올랐던 파우스토 카르모나는 2012시즌 로베르토 에르난데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2012년 1월 도미니카에서 기소됐는데 그의 진짜 이름이 ‘파우스토 카르모나’가 아니라 그보다 3살 많은 ‘로베르토 에르난데스’라는 사실이 들통났다. 중남미 선수의 여권 위조는 당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한 살이라도 더 어려야만 메이저리그 구단에 잘 스카우트됐기 때문. 파우스토 카르모나(6시즌 934⅔이닝 투구, 평균자책점 4.59)였을 때나 로베르토 에르난데스(5시즌 423⅔이닝 투구, 평균자책점 4.63)였을 때나 그의 성적은 비슷했다. 이름값이나 이름으로 투구하는 것은 아니니까.
이름 아닌 ‘사람’이 중요하다
다시 언니의 이야기. 언니는 이미 개명을 예고했다. 조건은 있다. “회사를 그만둔 뒤”라고 했다. 가족은 개명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이름을 바꾼다고 해도 누군가의 딸이고, 누군가의 아내이며, 누군가의 엄마이며, 누군가의 언니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언니는 퇴사 이후 새 마음, 새 뜻으로 새 관계 맺기를 하고 싶은 것일 테다.
이름을 바꾼다고 그 본연의 모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름이 아닌 ‘사람’이 중요한 이유다. 사실 손아섭이나 배정대 등이 야구 인생 전환기를 맞은 이유는 이름을 바꿨기 때문이 아니라, 성실 근면한 본연의 야구 자세 때문이었다. 그들의 절실함이 개명으로 이어졌고 그 간절함을 밑바탕 삼아 정글 같은 야구판에서 우뚝 섰다. ‘한유섬의 굿바이 홈런’을 기대해본다.
*이 글은 <한겨레21>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