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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신이 Mar 15. 2019

어린이집 적응기간 겪어보니    

세 살 아이와 엄마의 적응기

어린이집 현관문을 닫으려 하자 댕이의 얼굴이 찌그러지며 왕 하고 울기 시작한다. 난 아이의 우는 얼굴을 보면서 문을 꾸욱 닫았다. 댕이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길 기다리며 밖에 한 동안 서 있었다. 아이한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이의 어린이집 적응기간이다. 9개월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해 1년간 잘 다니던 댕이는 어린이집을 옮기게 됐다. 지난주 첫 3일간 내가 댕이를 데리고 새로운 어린이집에 등원했다. 다른 또래 아이들이 엄마 곁에 서서 수더분하게 시간을 보낼 동안 댕이는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시종일관 굳은 얼굴의 댕이는 알고 있었다. 이곳이 익숙한 어린이집이 아니고 자신이 새로 적응해야 할 어린이집이라는 걸. 하지만 댕이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따르던 선생님도 안 보이고, 아는 얼굴 하나 없다. 어린이집에서 1년 겪어보니 여기 있는 놀잇감도 시시하다. 마음에 안 든다. 내 불만을 맘껏 표출하겠어~!


특별활동 선생님이 오셔서 율동도 가르쳐 주셨지만 아이는 내 품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원래 이런 아이가 아닌데... 음악만 나오면 몸을 들썩이던 흥 많은 댕이는 지난 어린이집에서 언니네 반 특별활동에 참석하면 늘 잘 따라 한다고 칭찬받았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조금씩 우는 소리를 하더니 날 끌고 아무도 없는 방으로 가서 둘이서만 놀려고 한다.


결국 어린이집 적응기간 일주일이 다 지나기 전에 원장님께 이야기를 했다. 댕이를 맡기고 엄마는 나가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내 생각엔 엄마란 존재가 어린이집 적응에는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이었는데, 원장님도 동의하셨다. 댕이는 ‘엄마가 없어야’ 어린이집에서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 대신 선생님한테 정을 붙이고, 이곳이 자신이 낮 시간 동안 어떻게든 비비고 뒹굴어야 할 곳이라는 걸 알고 ‘타협’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적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린이집 적응기간은 ‘타협’을 배우는 시간



10분 후, 띠링 문자가 왔다.

 

‘어머니, 우리 댕이 울음 그치고 놀고 있습니다.’


다행이다. 어제보다 운 시간이 줄어든 것 같다. 아이는 우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엄마에 대한 배신감과 익숙지 않은 곳에서 아직 마음을 열지 않은 선생님과 하루를 보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리곤 자신과 타협을 했을 거다. 며칠 놀아보니 나쁘지 않았잖아. 저기 장난감도 여러 가지 있고. 여긴 밥도 괜찮고. 이왕 있는 거 그냥 있어주자.


조리원 시절부터 알던 엄마와 문자를 주고받았다. 댕이와 생일이 비슷한 그 집 아이도 새로운 어린이집으로 옮겨서 적응기간 중이다. 벌써 2주째 엄마가 동행하고 있는데, 그 집 아이의 반응도 댕이와 비슷하다고 했다. 처음 어린이집에 가는 아이보다 어린이집을 옮기는 경우 아이의 스트레스가 심한 것 같다. 그리고 특히 지금 21개월인 댕이의 월령은 엄마와의 애착이 강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 엄마는 우는 아이를 두고 돌아왔다는 나의 말에 ‘생각해보면 우리도 신학기 때 낯설고 힘들었던 거 같아서 전 조금 기다려 주려고요’라고 한다. 뜨끔했다. 기다려줬어야 하는 건가. 아이를 두고 나와버릴 게 아니라.


사실 아이를 빨리 어린이집에 적응시키고 싶었다. 아이가 어린이집 적응 기간인데 내 얼굴에 피곤할 때면 올라오는 뾰루지가 올라왔다. 2주 가까이 댕이와 거의 24시간 붙어있다 보니 힘들었나 보다. 평소 돈벌이를 위해서 조금씩 하는 일도 하지 못하고 있고, 집안일도 밀려있다. 남편은 또 때마침 며칠씩 집에 못 들어오는 힘든 프로젝트를 맡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아이의 어린이집 적응기간은 엄마에게는 어린이집의 도움을 받던 아이의 육아를 혼자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아이와 '함께' 적응에 ‘참여’ 해야 하는 참으로 무시무시한 기간이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적응하느냐 못 하느냐가 곧 나의 생활과 직결됐기 때문에 좀 서둘렀던 것도 있다.  


아이와 엄마의 적응기간


신학기 때 어땠었나 돌이켜보면 나도 꽤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익숙한 친구들과 헤어져 새로운 반으로 옮겨졌을 때 '누구와 말을 해야 하지' 하고 주위를 둘러보던 기억.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지 못하던 내성적인 성격의 나는 늘 뭔가에 익숙해지고 능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난 누구와 말다툼도 잘 못했지만, 한 마디 해놓고 '그렇게 말하지 말고 다르게 말할 걸'이라고 내내 곱씹으며 후회하는, 소심한 아이였다. 새로운 환경의 장소에 가면 늘 쭈뼛거렸던 기억이 난다. 하물며 댕이는 이제 겨우 세 살이다. 새로운 어린이집에 적응하는 일은, 댕이에게는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통째로 바꾸는 일과 마찬가지다. 아이가 지금 얼마나 큰 긴장감과 중압감에 둘러싸여 있을지 짐작이 간다.


내가 어렸을 때 신학기 때 엄마가 옆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도움이 됐을 것이다. 엄마 덕분에 안심되고, 든든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사람을 사귀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건 오롯이 내 몫이었다. 엄마는 그것을 대신해 줄 수 없다. 댕이도 마찬가지다. 어린이집은 댕이의 세계다. 댕이는 결국 혼자 그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들여보내기 전에 붙잡고 이야기했다.


"댕이야. 오늘 엄마는 어제처럼 댕이를 어린이집에 두고 집에 다녀올 거야. 댕이는 선생님하고 친구들하고 잘 지내고, 맛있는 맘마 먹고 있으면 엄마가 데리러 올게.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이는 다 알아듣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 손을 잡고 어린이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 참고 있던 아이는, 문이 열리자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울긴 울었지만, 댕이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가 한 말의 뜻이 무엇인지, 자신이 여기서 무얼 해야 하는지. 몇 시간이 지나 하원 시간에 어린이집으로 가니, 약간 부은 얼굴의 아이가 덤덤한 표정으로 걸어 나온다.


"댕이 오늘 어린이집에서 뭐 했어?" 하니 눈을 비비며 우는 시늉을 한다.

“울었어? 댕이 왜 운 거야?" 하니 잠자코 있는 아이.  

"엄마 보고 싶었어?" 하니 "응" 한다.


분명히 미술 활동 즐겁게 하는 사진을 선생님을 통해 받았었는데, 쏙 빼놓고 울었던 이야기만 한다. 엄마한테 투정 부리고 싶은 거다. '나 적응하느라 힘들었어' 하고.


“엄마도 댕이 보고 싶었어.” 하고 아이를 안고 얼굴을 부비부비 했다. 그리곤 손에 과자를 쥐어주니 별말 없이 먹는 데 집중하는 딸아이다. 댕이는 어린이집에 곧 적응할 것 같다. 적응기간이란 게 있었나? 싶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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