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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낭만고양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by 제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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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색스의 《디지털이 할 수 없는 것들》을 읽었습니다.


머지않아 어디서나 생활하고, 일하고, 배우고, 놀면서 손가락 하나만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집 앞으로 배달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자도 그렇고, 저도 그렇습니다. 미래에는 공간의 제약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 믿었죠. 그리고 그 믿음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공감과 이해의 공동체가 만들어질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국경, 신앙, 교리, 피부색의 갈등과 분열은 빠르게 사라질까요? 오히려 심각해질까요?

미래는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모바일 컴퓨터, 인터넷, 전기차, 스마트 스쿠터, 가상현실, 블록체인으로 구현될 것입니다. 우리는 더 행복하고, 건강하고, 똑똑하고, 부유하고, 그냥 더 잘 살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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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술은 계속 발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날로그 세계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세계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로그래밍에는 '인풋' 과 '아웃풋' 이라는 용어가 사용됩니다. 프로그램이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입력을 '인풋', 처리된 결과를 내보내는 출력을 '아웃풋' 의 의미로 사용합니다. IT 산업에 종사하면서,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생긴다는 가치관을 갖게 되었는데요.

저는 지난 몇년간 재택근무를 해왔습니다. 집에서, 공유 오피스에서, 카페에서 일해 왔습니다. 주로 집에서 일하지만, 일의 물리적 공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제가 직업인으로서 살아가는 기획자라는 직무는 머릿속으로 처리하고, 컴퓨터로 작업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클라이언트와 사용자를 만나 대화하고, 현장을 체험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대부분의 '기획 업무' 에는 혼자 고도로 집중해 문서화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저는 생산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아이디어를 떠올려야 하고, 아이디어는 밖에 나가 돌아다니는 동안 떠오릅니다. 밖에 나가서 신선한 인풋을 잔뜩 받아와야 아웃풋이 나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게 일이 됐든, 개인의 삶이 됐든 간에요. 신선한 인풋은 온라인 세상에서만 얻기 힘들고, 집안에서만 인지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모든 것을 몸으로 체화하면서, 내 주변의 세계와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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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풋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하루종일 집에서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고 있던 날을 떠올려 봅니다. 쉼없이 일하고,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 듭니다. 몸이 개운하지 않고, 소진된 느낌입니다.

반대로, 출장이 있어서 새벽부터 일어나 씻고 준비해 처음 가보는 동네에서 일하는 날은 같은 업무라도 훨씬 잘 풀렸습니다. 무엇을 우선해야 할 지, 일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 지 명확해집니다. 디지털 정보량은 비슷했는데, 아니, 오히려 더 적었는데, 몸으로 겪은 인풋의 밀도가 달랐던 것 같습니다. 더 적은 시간으로 같은 일을 해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제 일하는 방식에 작은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점심시간에는 되도록 골목을 한 바퀴 돌아봅니다. 사람들의 말투, 카페에서 들리는 소음, 햇살, 바람, 냄새 같은 것들을 의식적으로 관찰하려고 합니다. 약속이 없는 저녁에도 몸을 움직이려 노력합니다. 이런 아주 사소한 아날로그 인풋들이 쌓이면, 좋은 아웃풋이 나온다고 믿습니다. 개인의 삶에 필요한 기획, 나의 말, 일에 필요한 기획, 문서의 문장들에 스며든다고 믿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매일 꾸준히 보내려고 합니다. 디지털 기술로 결과물을 만드는 직업일수록, 그 결과물을 지탱해 줄 인풋은 최대한 아날로그에 가깝게 가져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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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남는 역할은 무엇인가?

정보를 모으고 처리하는 능력만 놓고 보면, 이미 기계가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일은 자동화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단지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기계가 훨씬 더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해치워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끝까지 놓지 않아야 하는 인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낭만과 의지에 그 답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굳이 효율적이지 않아도 선택하는 길, 큰 이득은 없지만 그냥 좋으니까 계속 붙잡고 있는 일들입니다. 멀리 돌아가는 산책로를 일부러 택한다든지, 수고를 감수하면서 손편지를 쓰는 행동으로는 계산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선택이야말로 디지털이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또 하나는 '어떤 인풋을 받아들이고, 어떤 아웃풋을 남길지 스스로 결정하는 힘' 입니다. 같은 디지털 도구를 쓰더라도, 어떤 사람은 불안과 분노를 키우는 방향으로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배움과 연결을 넓히는 방향으로 사용합니다. 기술이 아닌, 그것을 통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가 결국 그 사람의 인간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의지와 취향, 낭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디지털이 아무리 많은 것을 대체해도 아날로그 세계는 계속 살아 있을 것입니다.


"안아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저자가 마리 앤 에샘 박사에게 대화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입니다. 직접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말을 걸고, 안아줍니다. 서로 어깨를 맞대고, 서로를 바라봐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좇는 낭만이자 인간다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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