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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이 Apr 11. 2022

래퍼가 나에게 물었다. 너는 지금 누구냐고.

폴블랑코 | 사이렌

 나는 래퍼들의 음악 세계를 도통 이해하지 못했었다. 애초에 음악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뭔가를 자꾸 '이해'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접근 같지만, 라임이 어떻네 비트가 좋네 해도 어떤 가수가 잘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많이 듣지 않아서 더더욱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한두 번은 들을 수 있지만 가사를 외울 정도로 흠뻑 빠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랩은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과시를 하는데, 돈과 성공에 대해 어필을 할 때 대부분의 경우 (내가 그 가수를 모르기 때문에) 유명한지 모르겠으니 공감도 잘 안되고, 얼마나 성공해서 저러는 건가 싶기도 했다. (빌 게이츠나 일론 머스크가 랩을 하면 내가 와! 멋있다고 할는지 잠시 상상해본다..) 


 요새는 한국 음악에서도 마약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데 그것도 참 듣기 부담스러운 이유 중 하나였다. '미국에서 대마는 흔하대'라고 어디서 주워듣기는 했어도, 내가 경험한 것도 아니니 또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고 그다지 멋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즐겨하는 패션 분위기도 주로 어둡고 해골 같은 무늬들인데, 그것도 별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쓰다 보니 꼰대 하나가 요새 애들은 이렇네 저렇네 하는 꼴인 것 같다. 


 최근까지도 인기가 많았던 쇼미 더 머니를 본 적 있다. 듣다 보면 리듬과 운율감이 느껴져서 귀를 기울여보면 타인에 대해 비난에 대한 가사가 많아서 "사람 면전에 대고 저런 말을 하는 게 가능한가?" 하면서 떨지 않고 쉴 새 없이 말을 하는 그들이 신기해서 보곤 했다.  아무리 봐도 나는 힙합이라는 장르와 결이 안 맞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 폴 블랑코의 사이렌을 듣게 되었다. 솔직하고 담담한 가사 속에 죽은 친구의 묘사가 내 기억을 움직였다. 기억은 오래 전의 어두운 기억들까지도 단숨에 되살아났다. 제일 먼저 떠올랐던 것은 예전에 소년 법원에서 만났던 어린 친구들이 떠올랐다. 이상은 높았지만 현실로 마주하니 20대의 나로선 감당하기 버거워서 더 이상 엮이기도 싫다고 외면했었다.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두 번째는 나의 10대의 기억과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때 나는 주로 팝을 많이 들었는데 그때 들었던 외국 느낌의 비트와 음색, 이런 여러 요소가 한대 묶여서 꽤 비슷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내 안의 감성과 정체성에 집중을 했던 시기였기 때문일까?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러다 문득 내 앞에 놓인 일을 해내느라 늘 미뤄두고 외면했던 나란 존재를 갑자기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노래를 듣는 동안 상처받은 어린 영혼들이 나 여기 살아 있다고 외치는 소리와 그들이 몸부림이 고스란히 느껴질 때 놀랍게도 내 안에도 존재했던 어둠을 또렷이 보게 되었다.


 아주 신기한 경험이었다. 내가 주로 듣는 음악 장르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어릴 때 나는 서툴렀지만 글과 그림으로 자주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곤 했다. 그러나 20대가 되면서 점점 감정을 드러내는 글을 잘 쓰지 않았다. 뭔가 표현하고 싶었는데 정작 시도할 때마다 놀랍게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작은 욕구도 금세 사그라들곤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텅 빈 상태라고 인지했고, 그런 상태인 내가 너무 싫았다. 그것은 곧 내 무지와 무식함이라 생각했고 부끄러웠다.


 나의 순수한 창작 욕구와 영감은 이제는 다 사그라든 줄 알았는데 의도치 않게 힙합이라는 장르를 통해서 아름다움과 밝음, 희망에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서 공존하는 추함과 고통, 슬픔, 절망을 마주할 수 있었다. 래퍼들의 솔직하고 꾸밈없는 목소리엔 예기치 않게 외면해왔던 나 자신의 어둡고 힘들었던 감정을 보게 된 것이 참 신기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아마 앞으로도 디스곡이라는 이유로 무분별한 타인 비방이나 (여성 래퍼를 성희롱해서 대법원까지 갔던 사례가 있다!) 믿을 수 없는 허세로 느껴지는 곡이라면 큰 여운 없이 흘려듣고 말게 될 테니 좋은 곡을 추천받아서 이런 영감을 좀 더 발전시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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