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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의 오후 Sep 11. 2019

보잘것 없는 시절에도
언젠간 눈부신 날이 찾아온다

2010년 12월 오래된 어느 날, 그날의 기억은 이랬다.

밤새 소리 없이 눈이 내린 아침, 잠에서 깨어난 두 아이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날따라 남편은 지방 출장 중이었고 나는 전날 밤늦도록 작업한 시안을 들고 신사동까지 가야 했다. 

피곤이 발목까지 내려온 아침, 두 아이의 스키바지와 장갑들을 불러 모으느라 적잖이 시간을 허비한 터라 마음은 급했고 몸은 허둥댔다. 거래처 방문으로 간만에 차려입은 옷과 또각 구두는 내 마음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3살, 8살 한창 들떠있는 두 아이를 설득하며 어린이집으로 아이들을 몰았다. 집과 전철역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어린이집을 가려면 아파트 앞 사거리의 횡단보도를 지나 자그마한 공원을 지나가야 했다. 사거리의 횡단보도는 이미 지나간 차들의 열기로 눈이 녹아 시커먼 흙탕물로 변해 있었고 걸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지며 검은 물이 튀어 올랐다. 아랑곳하지 않고 첨벙거리는 두 아이를 거의 양손으로 들다시피 하며 조심조심 횡단보도를 건넜다. 둘째만 어린이집에 맡기고 나면 큰 아이랑 부리나케 전철역까지 함께 뛸 참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바로 아래로 향하는 몇개의 계단을 내려가 겨우겨우 공원 초입으로 들어섰다. 



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싶을 만큼 방금 지나온 길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동화 속 어딘가에 있을법한 마법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계단 주변을 쓸고 있는 동네 할아버지만 없었다면 스노우맨이 안내한 비밀의 숲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복한 눈이 수줍게 쌓여있는 길 위로 신난 아이들은 강아지처럼 여기저기 또록또록 발자국을 남기며 뛰어다니고, 풍경에 도취된 나는 현실은 까맣게 잊은 채 휴대폰 카메라의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그리고 사진과 함께 작은 메모를 남겼다.

‘보잘것없는 시절에도 언젠가 이렇게 눈부신 날이 찾아온다’

당시 일과 육아에 지쳐있던 나는 내 삶이 참 힘들고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다. 30대를 힘겹게 살아내고 있던 내게 작은 공원은 소리 없이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그 동네에 사는 동안에는 아침저녁 하루에 두 번씩 이 공원을 거쳐갔다. 크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동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있었고,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네라도 꼭 한번 타야 지나갈 수 있는 참새방앗간이었으며, 더불어 나는 지친 퇴근길 숨 한번 돌리는 쉼표 같은 곳이었다.


봄에는 벚꽃과 목련이 눈처럼 날리고, 여름엔 귀가 따가울 만큼 매미소리로 온통 뜨거운 곳이었다. 가을에는 색색의 낙엽으로 언덕을 물들이고 겨울엔 눈썰매 언덕으로 아이들에게 온몸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었다. 근처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다녔던 내 아이들은 그곳으로 아장아장 비 나들이를 가고 나뭇잎 갈아서 소꿉놀이를 했으며 여름엔 매미 껍데기를 모았고 가을엔 낙엽 포대자루 속에서 뒹굴었다. 


어릴 적부터 도시에 살아온 나는 이렇다 할 자연과의 추억이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사계절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그 작은 공원이 참 고마웠다. 요즘 재개발 이야기가 돌고 있다는 소식에 문득 예전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우리 아이들에겐 노래 '혜화동' 같은 곳이 아닐까. 재개발로 동네가 시끄러워지면 훗날 작은 공원은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이곳과 함께 했던 수많은 추억들이 사라질까 걱정되는 건, 망각의 도시에 살아온 경험 탓일까 아니면 나도 점점 옛날 사람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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