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원더키디 짤방으로 미래 시대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실은 애니메이션을 한 번도 보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너무 어릴 때이기도 했고, 이 애니메이션이 제 인생에서 가장 싫어했던 TV 프로그램인 전국노래자랑과 비슷한 시간대라 리모컨을 점유할 힘이 없었습니다.
2020년은 미래 시대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느 미래를 다루는 영화처럼 자동차는 날아다니지 않고, 복제 동물은 성공했지만 복제 인간까지는 성공하지 못한 어색한 미래입니다. 첨단 AI가 바둑으로 인간을 이기지만, 인간을 지배하지는 못하고, AI를 만들어내는 기술 관료가 사회를 좌우하는 테크노크라트의 시대도 아닙니다.
요즘 벤야민 해설서인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는 책을 읽고 있는데, #2020년 · #미래 시대 등의 키워드를 떠올리니 이 문장이 너무 좋았습니다.
‘곧 사라질 것들에 대한 구명(救命)으로 미래를 바라본다’.
곧 사라지는 것들을 살펴 통찰하고 위기의 현재를 구하고 미래를 맞이한다는 뜻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사라질 것들, 바로 직전에 사라진 2010년의 기억을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2010년 시작에 저는 ‘미래’를 꿈꿨습니다.
<하이프네이션>(이하 ‘하이프’)라는 3D 영화에 무려 한국 – 미국 합작영화. 당시 영화 <아바타>가 전 세계에 충격을 줬던 때입니다. 90년대 중반 <쥬라기 공원>처럼 ‘한국을 먹여 살릴 기술’ 타이틀이 붙어 여기저기서 3D 붐이 일었습니다. ‘하이프’보다 조금 빠른 타이밍으로 제작된 3D 영화 <현의 노래>는 제작이 지지부진했기에, ‘하이프’가 개봉만 하면 저는 한국 최초의 3D 영화 연출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한미합작인데!!
결과론적으로 ‘하이프’는 <하이프네이션 : 힙합 사기꾼>이라는 제목으로 3년 뒤에 잠깐 개봉했습니다. 실은 ‘하이프’만 해도 엄청나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이건 나중에.
그렇게 3D 이후에는 중국이었습니다.
중국 제작사와 만나야 한다며 PD가 부탁한 재난영화 시나리오를 급하게, 아주 급하게 10일 만에 썼고, 중국 제작사에서는 400억으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했답니다.
최초의 3D 영화 연출부에서 이제는 최대 규모 제작비의 각본가가 될 야심이 앞섰습니다. 영화만 만들어지면 당시 한국 – 중국 내 최대 제작비였습니다. 이거 발판으로 중국에서 시나리오 학원을 차리자, 중국어만 되면 다음에는 중국에서 감독하자.
당장 서점에 가서 중국 역사책을 샀습니다. 히딩크가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을 맡으며 처음 한 일이 서점에 가서 한국 역사책을 샀다는 일화를 들었습니다. 중국을 알아야 중국에서 뭐라도 한다. 뭐, 그 책은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걸 보면 중국은 못 갔고 최대 규모 영화 각본가도 되지 못했습니다. 심의까지는 넘어갔는데 주변 상황이 녹록지 않았습니다. 아, 지금은 모르겠지만 당시 중국에서는 영화를 제작하려면 심의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사실 그때 쓴 시나리오 소재가 백두산 폭발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개봉한 영화를 두고 주변에서 니가 쓴 이야기 아니냐, 표절 아니냐 이러는데... 하등 상관없습니다. 백두산이 폭발한다는 이야기는 10년 전부터 계속 있었으니까요. 내용도 완전히 다르고, 이번에 개봉한 <백두산>은 액션 영화잖아요. 저는 재난물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이렇게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그때는 조금만 버티면 중국 간다, 이번 달 월세만 카드깡하면 다음 달에는 계약금을 받는다, 식의 사생결단으로 생활했습니다. 결국 빚만 쌓였습니다. 계약금도 중국도 날아갔고, 빚을 갚으려 보안회사에 취직했습니다. <다큐 3일>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저를 처음 소개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용감씨의 영화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안회사 취직 했을 때는 영화가 끝난 줄 알았습니다. 나는 실패했다, 낙오자다. 학교 다니며 만든 단편영화는 실적이 하나 없고, 시나리오 공모전에서는 줄줄이 낙방하고, 심지어는 보험회사 직원과 만나고 싶어 ‘손 편지’까지 썼는데 차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실패했다고 생각한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재밌었습니다. 내가 어설프게 바보처럼 실패했다고 생각한 거지, 생활은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빨리 애를 낳아서 일을 시작한 친구, 야구를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던 동생, 몽골 사람과 연애를 했던 선임. 사람들은 즐거웠고, 저는 실패하지도 낙오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영화도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3개월이 지나니 내가 실패한 건가? 이게 왜? 보안회사 일하면서 이야기는 계속 썼고, 심지어 보험회사 직원에게 차였을 때 썼던 이야기 제목은 <연애고자>입니다. 진짜 ‘고자’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시나리오 다 쓰고 나서 혼자 울었습니다. 차여서 슬펐고, 내가 스스로 ‘고자’ 인증을 하며 이야기를 썼기에 더 슬펐습니다.
뭐 이것도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니, 고자를 인증하니, 이후에 고자를 뗐습니다. 그 당시 만난 사람이 지금의 공뇽양이니까요.
1년이 지나고, 이제 다시 영화판으로 가고 싶다고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연출부를 한 영화가 <슬로우 비디오>(이하 슬로우)입니다.
‘슬로우’만큼 같이 한 사람들이 고마웠고, 그런 사람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간 현장은 없었습니다.
보통 영화 현장에서 폭설로 얼어붙은 거리를 토치 불꽃을 이용해 얼음을 녹이려다 불꽃처럼 눈이 맞아 사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왜 시다바리네” 등으로 싸우고 욕하다 상대방을 아예 인정도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슬로우’는 살짝 달랐습니다. 토치를 많이 썼지만 저는 다른 여자 스탭과 눈이 맞지는 않았고, 대신 “시다바리네”를 외치며 싸우기는 했습니다. 그러다가도 싸운 스탭들과 화해하고, 생일 선물을 받기도 했고, 같이 술 마시다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좀 많이 지나면서 연락하는 이는 극소수이긴 하지만 그때 기억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참, 많이 좋은 것 같습니다.
술 마시다 쓰러진 경우가 많아서 그런데 당시 제작팀 분들에게는 미안합니다. 회식이 참 많았는데 때때로 쓰러진 90kg에 육박하는 거구를 택시에 태워 보내려 낑낑거렸을 테니까요.
그렇게 30살이 됐고, 연출부가 끝나고 학교에서 일했습니다.
단편영화 배급 일을 하며 영화제에 한 번도 초청받지 못한 열등감으로 “나보다 못한 놈들이 영화제나 가고 말야!!”는 등 지금 생각해보면 자다가 이불킥을 하고, 그러고도 쪽팔려서 화장실로 달려가 냉수로 세수를 하며 생각을 지워야 할 정도로 부끄러운 일도 많았습니다. 물론 저 부끄러운 이불킥 멘트를 했던 감독하고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재밌었습니다. 학교 영화관에서 프로그래머 겸 영사 기사를 하며 제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다양한 작품들도 발견할 수 있었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 반응을 바로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 어떤 장면에서 웃고, 어떤 말에서 울며, 어떤 때 사람들이 캐릭터를 보며 감동 받을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근데 이런 재미가 산산이 박살 나고 맙니다. 간간이 페북에 언급한 ‘포스터 사건’ 때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aW6G5qTlZw
뉴스에 얼굴이 나갔는데, 다행히도 공공 기관에 입사했습니다. 현 직장인 영상자료원입니다. 처음에 2년 계약직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사 일에 크게 관여도 하고 싶지 않고, 굳이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회사 일에 관심이 없었냐면, 당시 팀장이던 분이 있습니다. 태풍으로 찾아가는 영화관 일을 하는 직원들에게 조심하라는 단체 문자를 보냈을 때 답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나갈 건데, 내가 왜라는 생각으로.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죄송합니다.
그러다 굉장히 거대한 파도가 흐릅니다.
2017년. 대통령 탄핵입니다.
그 이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며 계약직에서 무기직으로 바뀌었습니다.
월급이 오르진 않았습니다만 안정감이 생겼습니다.
한창 나오던 정치 영화들이 몰락했고, 이전까지 제작사와 진행하던 영화 아이템을 드라마로 바꿨습니다.
근 10년 넘게 돌곶이앵(6호선 돌곶이역 근처 거주민을 부르는 한예종 은어) 생활을 청산하고 이사하려다 다시 돌곶이 근처 동네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한 달 동안 이사만 3번 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 스크롤 압박이 클 겁니다.
https://www.facebook.com/writemir/posts/1673986692683337
이사만 3번 하고 나니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더라고요.
꼭, 해야겠다 싶은 그런 마음.
다음 해인 2019년. 그래서 했습니다.
새로운 미래 시대가 도래하기 전, 결혼했습니다.
2010년 시작에 꿈 꾼 미래.
2020년 시작에 미래를 쓰고, 만들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구성하고, 영상화를 시킬 때
꼭 그 안 세계에 미래를 쓰고, 미래를 그리자.
과거 사건, 인물이 소재라도 미래를 넣자.
미래가 시작된 새해 벽 두
곧 사라진 과거를 소환해
곧 다가올 미래를 떠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