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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과장미의나날 Nov 06. 2023

 현장이고,감리인데,여자입니다

흔치 않은 여성 감리자가 바라본 건축현장의 에피소드

현장 15미터 전 도로 앞에서  어김없이 오늘도 제지당하고 만다

"더 이상,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다

경광봉을 들고 요란스럽게 호루라기를 불어대는, 새벽어둠 앞에 반짝이는 형광색 조끼를 입은 저 신호수 아저씨는 잘못이 없다. 당연하다, 여자가 운전하는 차가 건축 현장 바로 코 앞까지 왔다는 건 길을 잘못 들었거나, 틀림없이 길치인 사람인게 분명한 거다.

경비아저씨가 뒤늦게 뛰어나오며 차를 향해 경례를 건넨다 본분을 다했지만 실수를 한듯한 얼굴의 신호수 아저씨는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길을 내어준다 룸밀러로 보이는 경비아저씨와 눈을 동그랗게 뜬 신호수,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린다

“응, 맞아, ¹ 건축감리예요 , 감리단장...”.     




차에서 내리니 하얗고 푸른 입김이 쏟아진다 온도계 따위 보지 않아도 얼굴로 느껴지는 습기와 찬기는 온도를 짐작하게 한다 이런 날씨에 ²레미콘 타설이라니... 아마도 10분 후 현장소장은 울듯한 얼굴로 긴 하소연을 늘어놓겠지, 내 맘도 다를 거 없다 이미 며칠 전 내 손으로 싸인하고 승인해 준 일이니, 오늘 품질은 현장소장과 감리가 책임져야 할 사항이다

이른 아침인데 현장 앞은 이미 분주하다 모든 준비를 끝낸 이 사람들은 최소 새벽 6시 전에 출근했을 것이다. 검은 새벽에 집을 나왔을 저들, 나를 감사한 맘으로 일으켜 세우는 사람들이다

몇 달 새, 얼굴이 익숙해진 작업자들이 인사를 건넨다 저들은 내가 누군지 잘 안다 다른 사람과 헷갈릴 이유도 없다 하지만 나는 80명이 넘는 그들 중 절반 이상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저 짐작할 뿐이다.

    

남들과 다르지 않게, (현장에서는 누구나 그렇듯이)

안전모를 쓰고, 안전화를 신고, 도면파일이 든 패드를 옆에 끼고 현장으로 젠걸음을 걷는다

하지만, (원치 않지만)

나는 현장 곳곳에서 작업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오해 마시라

내가 토르나, 닥터스트레인지 박사 같은 능력자라서가 아니다

(하긴, 현장에선 두 사람이 나타난다고 해서 크게 놀랄 것 같은 사람은 별로 없다

커다란 망치나, 희한한 불빛을 내는 금속판 같은 걸 들고 다니는 사람은 건축현장에선 흔한 일이니까.)     


정작, 현장에서 보기 힘든 건 나 같은 사람이다

얼굴 마주쳐 지적당하면 피곤해지는 감리, (맞다) 내 눈에 안 띄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인사를 건네면 상냥하고 싹싹하게 받아 주는 여자.

그러니까, 거친 현장인데, 감리인데, 여자인 거다.

착공부터 6개월여 동안 어김없이, 눈에 띄고 싶지 않지만 인사는 하고 싶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상황은 아침마다 작업자들의 양가감정 안에서 계속된다.     




젠걸음으로 서둘러 올라간 ³ 슬래브 위는 레미콘 타설 준비가 완료되었고 삼삼오오 모여 믹스커피에 언 손을 녹이는 중이다 내가 손을 머리 위로 가져가니 몇몇 작업자들이 서둘러 안전모를 착용한다

“머덜라고 여그까지 올라오셨소~ 알아서 잘 하는디~”

지적을 받아 뻘쭘한 작업 반장이 살갑게 한마디 건넨다

현장소장이 저만치 있다가 기다렸단 듯이 다가온다

예상은 적중했다

손과 눈으로 안전시설과 타설 전 준비사항을 점검하는 길지 않은 잠깐의 시간을 못 참고

그는 이 추위에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지 뒤따라 다니며 계속해서 하소연 중이다

하소연이 더 길어지기 전에, 마침내 나는 작업을 시작해도 좋다는 승인을 내린다.

지적사항 없이 오케이 받은 현장소장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간다.

     

그러다 갑자기 와, 해다!

11시 방향에서 떠오른 해가 반갑다.

철근이 시공된 슬래브 위에서 떠오르는 해를 온몸으로 받아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철근 마디 하나하나마다 반사되어 반짝이는 햇살은 온통 황금색이다. 현장 소장의 때 묻은 회색 안전화마저 태양빛으로 눈부시다.

12층까지 숨 가쁘게 올라왔다. 다시 이 커다란 건축물을 꼼꼼히 훑으며 지하 3층까지 천천히 내려가는 게 오늘의 주된 여정이다. 현재 12층짜리 이 건물은 결국 25층으로 변신해갈 것이며, 평범한 여자 감리단장의 유별난 현장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 주석 -

1. 건축감리(감리단장): 건축물에 대한 설계도면 및 시공사항을 법적, 기술적으로 감독하고 관리하는 일 (건축, 구조, 토목, 기계, 전기, 소방등의 분야가 모여 감리단을 이루고 건축분야의 감리가 가장 큰 감독 권한을 갖는다)

2. 레미콘 타설: 철근콘크리트 구조 등에서 거푸집으로 만들어 논 빈 공간에 콘크리트를 부어 넣는 시공 작업

3. 슬래브 : 당신이 지금 건축물 위에 있다면, 발 딛고 있는 바닥과 머리 위에 있는 천정을 말한다

건축에서 구조물의 바닥이나 천정을 구성하는 판형상의 구조 부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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