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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과장미의나날 Nov 07. 2023

브런치, 혼돈의 서랍

 남쪽나라 임금은 숙입니다 북쪽나라 임금은 홀입니다 중앙에 사는 임금은 혼돈입니다

숙과 홀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던 혼돈은 가끔 두 임금을 혼돈의 땅으로 초대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극진히 대접했고, 숙과 홀은 어느 날 본인들에게 호의를 베푼 혼돈에게 보답하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주면, 혼돈이 기뻐할 것인가....?”

두 사람은 고민하다 합의에 이르렀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얼굴에 일곱 개의 구멍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 쉬고 있지요 그런데 혼돈은 이런 구멍이 없어요 우리가 구멍을 뚫어줍시다”

그들은 혼돈에게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주었습니다 이레가 되자 혼돈은 죽고 말았습니다 』

-장자의 <응제왕> 이야기 중에서 -     




나는 숙과 홀에 가깝다 혼돈은 아니다. 

아니, 혼돈이었으나 아니기로 맘먹은 지 오래되었다

숙과 홀이 그렇듯이 당연한 질서를 소망한다 아무것도 아닌 상태, 무질서한 상황, 혼돈이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질서가 있어야만 덜 피곤한 내 인생, 타고난 성격의 문제이다     

브런치의 시작은 명백한 실수였다

브런치 작가에는 관심도 없었지만 그 프로젝트에 스스로, 기끼이, 그것도 마감이 될까 조바심 내며 신청하는 우를 범하고 만 어이없는 실수.

      

그것은 [이은경]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일방적으로 (지금도 여전히) 호감만을 품고 있는 그 이름만으로도 프로젝트의 자세한 내용은 읽을 필요도 없었다 덜렁거림의 거침없음은 나의 신경세포나 근육을 완벽히 지배한다 신청을 누르고 망설임 없이 입금을 완료했다

평소에 글 쓰는 걸 좋아하지만 글쓰기를 하지 않는 나를 위해, 그리고 (무책임하게도) 글쓰기에 관심이 있어 보이는 내 주변 지인에게도 권유했다  “뭐 거창한 걸 하자는 건 아니고, 강의 몇 번 듣고  다 같이 글 써보자는 거 같아요, 해볼래요?” 며칠 후 나보다 열 배 이상 똑똑한 그는 친절히 설명했다 “잘 모르고 있는 거 같은데, 프로젝트를 신청하면 브런치 작가가 되셔야 한데요.”  레몬맛 사탕을 딸기맛으로 알려준 내게 “그래도 고오~맙다”는 인사를 남기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덜렁거린다는 말을 수없이 듣고 자랐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사회에 적응하면서도 덜렁거림은 곧 엄마의 한숨이나, 선생님의 꾸지람 혹은 실수를 너그러이 이해해 줄 필요 없는 상사에게 모자람을 한껏 뽐내는 바보 같은 짓이었다 덜렁거림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혼돈을 없앨 것. 

주변을 정리하고 무질서한 상황을 용납하지 않을 것. 

언제 어디서나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아무도 내 실수를 눈치채지 못하게 할 것. 

내가 “관계” 속에서 무던히 살아남은 방법은 나에게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질서에 따라 일하는 건 (다행히도) 잘하고 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르다 

덜렁거리고, 즉흥적인 걸 좋아하는 나는, 뭐가 한두 개 빠진 들 상관없고 허허실실 거의 모든 것에 너그러운 편이다 질서보다는 자연스러운 상실을 즐긴다

하지만 아쉽게도 브런치는 질서이다 규칙적이고 꾸준해야 하고 심지어 좋은 글을 써야만 하는. 

“태생적” 혼돈으로 “후천적” 질서에 매달려 사는 내겐 버거운 일이다 당장 숙제부터 하기 싫다 이렇게 나를 스스로 볶아대다간 [일주일 동안, 브런치 작가였다]로 끝날걸 직감한다     




별것 아닌 비밀이지만 이곳에 공개하기로 한다 나의 속옷 서랍은 온통 혼돈의 도가니다 바로 위 서랍 속 남편의 속옷은 아주 가지런히 세 번 각을 잡아 켜켜이 모셔져 있지만 내것은 그것과 다르다 브라와 팬티가 마구 뒤섞여있고 브라훅이 팬티의 레이스에 걸려 끼여 있는 것도 다반사다.

일상의 거의 모든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나만의 작은 무질서다

누구에게도 불편하지 않은 나만의 무질서, 내 속옷 서랍은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곳을 정리할 맘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슬초 브런치 2기 프로젝트]는 이렇게 쓰인다.

나의 브런치는 혼돈을 유지하기로.

숙과 홀과 같은 호의로라도 질서를 부여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로.

일주일 동안 브런치를 방치했다는 이유로 자괴감 같은 거 느끼지 않기로.

글쓰기를 스스로 다짐하고 힘겹게 올린 글에 라이킷이 몇 개인지 신경 안 쓰기로.

다만, 하루에도 몇 개씩 떠오르는 글쓰기 소재들은 브런치를 위해 정리하여 "킵"해두기로.

자극이 될 때마다 내 맘에 드는 글을 써보기로.  

   

글쓰기는 하고 싶었던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이고, 누구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브런치에서 만큼은 맘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수많은 질서 안에서 작은 무질서가 필요하다 덜렁쟁이 그 자체로 살고 싶다 불특정 다수에게 멋있어 보이기 위해, 나의 또 다른 욕망을 위해(그런 거 따위 있을 리 없다) 혹은 주변에 허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 없이 그저 내키는 대로 생각하고 내키는 대로 적으며 내키는 만큼만 글을 써도 상관없어야 한다 속옷 서랍처럼 혼돈 속에 놔둬야만 한다 (브런치 관계자에게 미리 심심한 양해를 구한다) 그것이 나라는 사람을 온전히 보여주는 <브런치>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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