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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과장미의나날 Nov 16. 2023

고양이의 유언, 노팅힐 책방 사장과 점원들의 금요일

2028년 11월 10일 금요일, 날씨 맑음

#1 노팅힐은 영화 제목이 아니다

가을은 잊지 못할 원나잇의 달콤함 마냥 스치더니, 초겨울이 허기진 곰처럼 허겁지겁 찾아왔다.

작은 마당에서 우리만의 근사한 파티를 약속한 오늘, 나의 소중한 점원들을 위해 그젯 밤부터 잠을 설치며 바람을 걱정했다 겨울의 바닷바람은 매섭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너무나 쓰다. 다행히 이른 아침의 햇살과 반짝이는 파도 속으로 녹아든 그것은 훈풍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가볍게 불어왔다 마당 장대 위 설치할 작은 조명들을 주문한 건 잘한 일이다 오늘 오후 그 반짝이는 조명들 아래 노팅힐 책방 점원들이 모였다.


<노팅힐>에서 가장 사랑하는 한 장면이다 -출처 영화 "노팅힐"

세기말(1999년) 개봉한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 주연의 영화 <노팅힐>, 그 영화를 쉽게 잠들지 않는 아이를 겨우 재워 놓고 음소거 상태에서 숨 죽여 보곤 했다 노란 크림이 가득한 커피를 줄리아의 하얀 크롭티에 쏱던 휴의 얼굴과 파란색 서점 파사드를 잊지 못하고 5년 전 영국에 다녀왔다 그리고 런던의 노팅힐이 구제와 골동품으로 유명한 거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알록달록한 건물들 말곤 특별할 것도 없는 그 거리를 수십 번 걸었고 작년 삼척 바다가 보이는 한가로운 국도 한편 언덕에 <노팅힐>이라는 책방을 열었다 다행히, 여행서적을 고집스레 팔며 적자로 전전긍긍하던 휴와 달리 잡학다식한 베스트셀러를 팔며 영화에서 보다는 나은 매출로 세명의 비상근 점원과 함께 일하고 있다 우리 책방은 책을 사면 커피와 멋진 풍광, 그리고 직접 만든 시나몬롤을 제공한다  딱히 생산적이지도 않은 글을 쓰는 딴짓을 하면서도 책방이 망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 이유이다

한가로운 국도변 언덕 책방에서 도대체 누가 책을 사는가...?라고 묻는다면

글쎄, 시나몬롤이 너무 맛있어서…?

#2 노팅힐 책방, 놀고 싶은 직원들

제1 점원인 하루키는 이 책방의 가장 큰 수혜자이다 보고 싶은 책을 그냥 꺼내 읽으면 되니까. 그리고 가장 유능한 점원이다 커피를 능숙하게 내리고 빵 굽는 일도 사장보다 잘한다 영미 소설이나 시를 좋아하는 그녀는 오래된 대안학교의 교사였다 삼척에 처음 왔을 때 가장 큰 도움을 준 지인이며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하루키는 분명 아줌마지만 전형적인 아줌마 스타일은 아니다 그녀는 절대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매우 동안이며, 나이에 비해 날씬하고 다부진 몸을 가졌다 함부로 옷을 입는 것을 매우 꺼리기 때문에 늘 청바지 위에 멋진 셔츠나 니트 같은 것을 입는다 놀고 싶을 때 몇 권의 책을 들고 사라지는 것을 제외하곤 <노팅힐>의 하루를 나와 함께 한다.

제2 점원인 재규는 나의 남편이다 그는 소탈한 미소와 멋진 목소리를 가졌고 놀라울 정도로 티브이를 좋아하고 즐긴다 제주도에 살고(우린 올해부터 각자 살고 있다) 계절이 바뀔 때 쯔음 삼척에서 머문다 사업장이 경기도에 있어 제주, 삼척, 수원, 삼각형을 지도에 그리며 바삐 사는 사람이다 26년 전 신혼 초 사주를 몇 번 봤을 때 그에 대해 관통하는 언어들이 있었다 “오래 걸려~, 대기만성이네, 기다려!” 과연, 그는 그때의 사주처럼 60대가 다 되어 빛을 발했고 그 덕에 우린 자주 볼 수 없어서 더 행복하다

제3 점원인 준, 나의 달콤하고 쌉싸래한 초콜릿 같은 아들, 그는 올해 수능을 치루지만 이미 수시에 합격해 당분간 나의 점원이 되었다 책방 이름을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라고 짓자며 디자인 콘셉트까지 계획했던 그는 야심 찬 의견이 기대만큼 반영되지 않자 친구들과 무작정 놀고 싶다며 가출을 시도했지만 막상 공사를 시작하니 놀라운 인테리어 감각으로 멋진 파트너가 되어 주었다 그 녀석은 쿠키 때문에 삼척에 머문다고 언제나 말하지만 나는 안다, 누구보다 엄마와의 의리가 충만한 녀석임을. 그의 다정한 미소는 입가에 보조개와 함께 타인에게 납득시킬 필요도 없이 이미, 완벽하다.     

#3 쿠키 그리고 그녀 애인의 유언

쿠키는 아름답다. 쿠키는 고양이다 블랙, 브라운, 화이트가 완벽하게 조화로운 삼색고양이. 태어나 삼개월쯤 애기일때 내 품에 안은 (쿠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나만의 반려묘이다 여전히 미모도 상당 수준이다 미모에 걸맞게 녀석은 왕성한 연애질을 하며 오래전 중성화 수술이 무색할 만큼 잘 지내고 있다 그녀에겐 “오레오”라고 불리는 블랙에 화이트가 섞인 털을 가진 늙은 애인이 있다.


오늘의 소동은 노팅힐 책방의 노는 게 제일 좋은 점원들과 파티가 약속된 오후에 일어났다 마당에 장대를 세워 노란색 조명을 촘촘히 널고 테이블에 큼지막한 아프가니스탄 블루 보자기를 깔아 투명 유리잔과 접시들을 세팅한 직후였다 하루키는 레드와인을, 재규는 랍스터, 준 군은 주방을 오가며 소소한 것들을 옮기고 있을 때 늙은 오레오와 그의 연적인 수컷 고양이가 마당 한편에 어슬렁 거리며 나타났다 마치 해가 질 무렵의 서부총잡이들처럼 홀연히.

먼저 시비를 건 쪽은 이 동네에서 가장 포악하기로 소문난 이름 없는 수컷 고양이였다 하필이면 그 둘의 다툼은 꽃병과 파티 식기로 세팅된 멋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시작되었다. 서로를 탐색하는것도 잠시 우당탕, 의자가 넘어지고, 넋이 반쯤 나가 얼음이 된 우리들 중 준이가 가장 먼저 쿠키를 끌어안아 올렸다 오래지 않아 테이블보 위 어지러운 발자국과 깨져 버린 유리조각, 엉켜버린 조명들, 그리고 쿠키의 앙칼진 외마디!

늦었다. 결투는 반드시 희생이 동반되어야 하는 법.

위태롭게 조명줄에 매달려 있던 오레오가 힘없이 툭, 떨어졌다 그리고 마치 마지막 유언을 남기듯 "가르랑" 소리를 여러 번 내며 숨을 거두었다.

내 친구 하루키가 해석한 유언의 내용은 이러했다.

“나의 쿠키, 이별이 끝이 아니듯 사랑도 끝난 게 아니오....”


그새 하늘에는 군더더기 없이 말끔한 노란 달이 떠 있었다.

#4. 삼척과 친정아빠, 그리고 나에게 묻는 안부

가장 소중한 나의 가족에게서 독립하겠다는 생각을 품었었다. 친정아빠가 돌아가신 직후, 아들 준이 나이 5살 즈음이었다 친정 아빠와 나는 삼척에서 달고 맛난 자연산 회와 소주를 마셨고 언덕 위 호텔에서 굉장한 파도를 보며 신기해했다.

그리고 아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2028년 11월 지금, 삼척이라는 곳에서 책방을 꾸리고 작가 생활을 시작하는 이유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가족을 돌본 후 어딘가에서 뭔가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그곳은 삼척이었다. 해질 무렵 대책 없이 슬펐던 수많은 저녁 시간들, 그때 나는 아빠와의 마지막 여행지인 삼척을 자주 떠올렸다 아빠와 각별히 친하지 않았음에도 자주 기억하고 싶었으니 그것이 지금 삼척에 머무는 이유일지도.


삼척에는 시나몬롤이 맛있는 <노팅힐 책방>이 있고, 여전히 돈독한 가족이 있으며, 예쁜 쿠키와 나를 아껴주는 친구도 있다. 그리고 혼자라서 더 좋을 나만의 노후를 멋들어진 텍스트들로 채워줄 '작가'라는 타이틀도 '여기', 있다.

해가 없는 흐린 바다를 바라보며 묻는다

‘뭘 더 원하니?’

아니다, 질문은 잘못되었다

다시 대답한다

‘이제는 내가 원하는 것들로부터 나를 지켜주길...’

오늘 일어난 소동과, 아빠와 가족과의 이별이 그러하듯 행복이 슬픔으로 변할 때 담담히 내 안에 새겨 넣기를.

파도를 기다리는 저 서퍼들처럼 형형한 눈빛으로 글을 쓰고 바다를 흠모하며 살기를.

놀랍게도, 나는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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