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업체 따라잡기
1972년 대통령령으로 조병창 설치 근거가 마련되어, 국군이 사용할 개인용 화기를 생산하기 위한 활동이 법적으로 뒷받침되었다. 이즈음에 공사가 시작된 조병창은 1973년 11월에 완공되어, 그 이듬해 생산에 들어간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헬기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조병창 장소로 선택한 곳이 지금의 부산시 기장군 일대다. 해발 605m 높이에 40도 이상 급경사인 철마산과 공덕산 등으로 둘러싸여 적의 전투기의 폭격에도 안심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 같은 곳이어서 박 대통령이 결정했다는 설(說)이 있다. 이 조병창은 원자재 투입부터 완제품 생산까지, 모든 공정을 한 곳에서 끝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원스톱(one stop) 공정이었다. 당시에는 나름 최첨단 제조시설이었다.
미국 콜트사로부터 면허 생산권을 얻어 조병창에서 M16을 생산하기 시작한 게 1974년, 베트남전에서 유입된 원조 미국제와 국내 생산형 M16 소총은 1978년께 전방 사단에 대한 보급을 마쳤다. 미국으로부터 M-1 소총을 지원받은 뒤로부터 3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M16 소총으로 교체된 것이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81년 말, 부산 조병창은 국가사업 민영화 정책에 따라 대우그룹으로 넘어간다. 이후에 어찌어찌 몇 번의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은 방산업체인 SNT모티브가 운영하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당시의 조병창이 단순히 콜트사의 M16 소총을 면허 생산하는 모방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권총, 기관단총, 기관총 등 다양한 총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했다는 점이다. 민간 기업의 기술력이 취약했던 당시에, 조병창의 운영 경험이 향후 우리나라 정밀기계공업의 산실 역할을 하게 된다. 부산 조병창을 우리나라 방위산업의 출발점으로 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탄약과 화력 분야와 달리 해군의 함정분야 사업은 발달 속도가 늦었다. 지형적으로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역시 삼팔선 너머의 적이 경계 대상의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다의 안전도 대간첩 작전과 해상에서의 포격전이 중심이었다. 쉽게 말해 해군의 역할은 육군을 지원하는 포지션(position) 정도였다. 따라서 정부는 해군 함정이나 잠수함 등의 방산물자 개발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육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말이다. 당연히 해군 무기체계와 관련된 국내 방산업계의 발전 수준도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민간 조선업 발달로 방위산업 인프라(Infra)가 함께 성장했다는 점이다.
항공분야는 더 심했다. 공군의 전력 핵심은 누가 뭐라 해도 전투기다. 전투기는 수많은 무기체계 중에서도 최신 무기이자 첨단장비에 가깝다. 고도의 기술력이 장기간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산화가 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는 애기다. 그래서일까? 2000년대에 들어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국산 전투기를 언급한 이후 처음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20여 년이 흘러 금년 4월에야 비로소 한국형 전투기(KF-21) 시제기가 우리 힘으로 제작되었다. 이처럼 항공기는 오랜 경험과 장기적인 투자 그리고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사업영역이다.
육군의 첫 전차를 국내에서 제작한 것이 1987년 그리고 해군 사업부가 국산 구축함을 배치한 것이 1990년대 후반이었다. 반면에 국산 전투기는 이제야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