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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스 Oct 02. 2021

모녀관계의 번아웃

추위가 시작되던 어느 날이었다.

무릎이 아픈 엄마 생각이 났다. 안부도 물을 겸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엄마는 욕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엄마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던 나는 잠시 의아했지만,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내가 전화를 하기 전 누군가 엄마의 분노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엄마의 분노가 끓어오르던 그 찰나에 내가 전화를 한 것이다. 엄마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엄마는 진정되지 않았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지만, 매번 당황스럽기는 하다. 엄마는 화가 나면 주변 사람에게 쏟아내는데 주로 그 대상이 나였다. 누군가, 어떤 일이, 정치가 엄마를 분노케 하면, 그 감정은 여지없이 나에게 공유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엄마의 그런 감정을 나눠 가져야 했다. 어떤 책 제목처럼 나는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었다.


엄마의 그런 쏟아 냄을 받아 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엄마가 다른 가족들에게는 그러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섭섭한 마음도 있었다. 어느 날은 엄마에게 왜 나에게만 이런 얘기를 하냐고 따져 물은 적이 있다.

 “너 아니면 내가 어디 가서 이런 말을 하니”. 엄마는 도리어 화를 냈다. 엄마는 자신의 감정을 털어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듯했다.

 

“네가 내 말을 잘 들어주니까”  

“이렇게 말을 하고 나면 내 마음이 좀 진정이 돼.”


이 정도의 말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순간 ‘나는 엄마에게 존중받지 못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은 들었다.  딸이라는 이유로 가족이라는 이유로,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배려'라는 말은 생략된 지 오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엄마는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자주 사용했고, 나는 나에게 전달된 부정적인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한 시간을 다시 가져야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가 그날 결국 댐이 터지듯이 내 마음이 툭  터져버렸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꾹꾹 눌러 담아왔던 나의 불편한 감정은 한계점에 도달했다.


MBTI로 말하면 나는 I 성향이고 엄마는 E 성향이다. 나는 말을 듣는 것이 편하고 자기표현에 소극적이고 다른 사람 눈치를 많이 본다. 이에 반해 엄마는 주도적이고 자기표현이 강한 다혈질에 가깝다. 거기에 부모관계라는 관계 설정까지 더해지니 나는 엄마의 말에 거부하거나 반대하기가 어려웠다. 엄마가 주도하고 내가 따라가는 모녀관계가 지속됐다.

엄마에게 내 생각이나 감정을 잘 내색하지 못했다. 내가 머뭇거리고 고민하는 사이 엄마는 먼저 엄마의 감정을 꺼냈고, 나는 그 감정을 함께했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느끼는 것이 내 감정이 아니라 엄마의 감정이라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감정에 휩쓸려가며 지내왔다.


  답답한 순간들이 있었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엄마는 대화의 주도권을 쥐었고,  나는 늘 그 주도권을 따랐다. 엄마와 나의 전화통화는 패턴이 있다. 먼저 엄마가 할 말을 한다. 나는 엄마의 말을 듣는다.  내가 내 이야기를 할까 머뭇거리는 사이 전화는 끊어진다.


  “엄마와 딸은 제일 좋은 친구가 된다.”라는 말처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이야기도 만만치 않게 나를 압박한다. 거기에 누구에게나 칭찬받고 싶어 하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 부모 말을 잘 들어 인정받고 싶다는 인정 욕구까지 더해져 나는 내 감정을 억누를 때가 많다.


나는 마흔을 넘겼고, 엄마는 이제 칠순을 넘긴 할머니다. 시간이 갈수록 엄마를 이해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나도 엄마도 각자의 생각 속에서 서로 다른 세계를 견고히 세워 나가고 있다. 모녀관계는 점점 평행선이 된다. 마음이 모아지기보다는 그저 각자의 생각과 감정을 고수하며 달려가기 바쁘다. 어떤 문제건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더 친밀 해지거나, 마음을 터놓는 관계로의 진전은 더 이상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지금처럼 이렇게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소통도 어렵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관계를 이어가는 일만이 남겨졌다.


 엄마의 지나온 삶은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모든 엄마들이 그렇듯, 엄마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온 힘을 다해 가정을 지탱해 왔다. 자녀들을 키우고, 손주들을 키우고 엄마의 삶은 온전히 가족들을 위한 삶이었다. 엄마는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자식들을 사랑해왔다. 나 역시 그 사랑과 수고의 수혜를 입고 여기까지 왔다. 다만 그런 엄마의 수고와 희생으로 모든 것을 긍정하기에는 어려운 지점에 와있다. 더구나 엄마의 희생에 대한 보답으로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엄마의 전화를 끊고, 나는 매우 간단하게 나의 불편한 감정을 담아 문자를 보냈다. 엄마는 나의 이런 반응을 단순한 컨디션 난조로 여겼다. 지금도 엄마와 여전히 종종 연락을 한다. 전화 통화는 가급적 피하고 카톡으로 대신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관계일 수 있는 이 관계를 잘 유지하는 일에 나는 실패했다. 엄마는 엄마의 타고난 성향대로 살아왔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다만 나는 관계 속에서 상대방의 성향이 내게 가져다 줄 부정적인 측면을 잘 다루지 못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감당해야 한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만한 에너지를 잃어버린 딸. 그것이 나의 현재 상태다. 어리석게도 나는 착한 딸이 되고픈 환상에 빠져,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에서 발을 빼지 못했다. 힘들고 벅차다고 말하지 못했다. 관계에 있어서 나에게 주어진 권리를  행사하지 못했다.


엄마와 나의 관계는 번 아웃되었다. 어떤 관계도 아무런 수고 없이, 온전한 성찰 없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 관계의 이면을 냉정하게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거기서 내가 맞이하고 있는 손실을 돌보지 않는다면 번아웃은 찾아온다.

모녀관계일지라도 예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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