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이스 Oct 08. 2021

자식은 부모를 모르고, 부모는 자식을 모른다.

엄마에게 기어이 짜증을 내고 말았다. 복에 겹게도 부모님은 부실한 딸 몸보신하라고 일 년에 한두 번씩 건강보조식품을 보내신다. 보내주시는 것들, 보내시려고 시도하는 것들은 대게 여자 몸에 좋다는 것들이다. 이거 먹고 몸 좋아져서 아이 낳으라는 숨겨진 메시지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아이 없는 내게 ‘자식은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단념 못하시는 부모님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 마음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보내주시는 것 감사히 받아먹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 몸에 문제가 생겨, 산부인과 의사로부터 비타민, 건강보조식품, 여자 몸에 좋다는 것들을 절대 금지하라는 경고를 받고 이 모든 것을 중단한 지 2년이 다 돼간다. 그런 내게 엄마가 홈쇼핑을 보다가 전화를 하신 거다.


“ 흑염소 먹을래?”


 산부인과적 문제로 여러 차례 수술해서 고생도 했고,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의 문제를 막기 위해 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도 엄마는 또 그러신다. 정말 엄마가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걸까. 아니면 내가 한 말이 엄마에게 그 정도로 기억할 만한 가치도 없는 걸까. 아니면, 정말 엄마의 기억력이 나빠진 걸까. 순간 여러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엄마에게 했던 말을 반복한다. 이번에는 제발 엄마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내가 짜증을 내며 말하면 엄마가 좀 더 기억하기 좋을까.

 

흑염소는 여자 몸에 좋다는 널리 알려진 보양식이고 아이를 낳기 위해 준비하는 여성들이 많이 먹는 건강식품이다. 쓰고 비린 맛을 아는 터라 달갑지는 않아도 먹고 나면 기운이 난다. 그래도 이제 내가 먹어서 안 되는 약이다. 엄마가 먹기 싫은 것을 보내주시면, 억지로라도 먹는다.

 보내주신 마음을 생각해서다. 다만, 먹어서 안 되는 것을 감사하다고 받을 수는 없다. 부모님이 괜한 돈을 쓰시게 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그냥 받아서 버리라고도 하는데,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는 한이 있어도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예전에는 엄마의 이런 호의를 극구 사양하거나, 격렬히 저항했다. 물론 엄마가 이긴다. 부모님이 괜한 돈 쓰실까 필사적으로 막아보지만, 고집을 꺾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가 아닌가는 상관없는 문제다. 중요한 건 부모님의 뜻과 의지뿐이다. 주시는 것을 감사히 받는 것만이 오로지 부모님을 진정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터득했다.


그동안 몇 차례 그런 실랑이를 벌이다가, 나의 과거 병력을 다시 꺼내 설명하고, 의사가 금지했다는 말까지 덧붙여야 엄마는 포기하셨다. 그랬는데 또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를 잘 알고 가장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이 엄마라는 생각을 할 때, 이런 상황에서 내가 느끼는 실망감은 무척 크다. 내 말에 좀 귀 기울여 주었으면, 내 말을 좀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생긴다. 엄마의 뜻과 의지를 주장할 수는 있지만, 진짜 내 생각이 무엇인지 물어봐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엄마의 그런 주도성은 이미 알고 있던 바이지만, 그 주도성이 엄마의 삶뿐 아니라 자식들에게 향할 때 자식들은 무척 좌절한다. 신조차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했다는데, 왜 엄마는 자식들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지 않는 걸까. 설득의 과정이 무산되고 나면 어느 한쪽이 포기해야만 이 줄다리기는 끝이 난다.

아무리 말해봐도, 엄마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홈쇼핑에 주문하기 전에 전화를 해준 것이 고마울 지경이다. 주도하는 자와 끌려가는 자의 팽팽한 대결이 남겨진다.


엄마가 내 생각과 의견에 관심 없다는 불만이 있지만, 사실 나도 엄마의 생각을 잘 아는 것은 아니다. 한참 전이었다. 엄마는 지나가는 말로, 필요한 게 있는데 시장에선 비싸다. 인터넷에선 싸다더라 고 말하신 적이 있다. 그러면서 인터넷에서 주문하는 법을 몰라 결국 비싸게 샀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다. 그때는 그냥 흘려 들었다. 지나가는 말로, 엄마가 으레 늘어놓는 그런 푸념인 줄 알았다.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 대화에서 엄마가 내게 원한 대답이 “엄마 그런 건 내가 주문해 줄게”라는 걸.


엄마는 늘  답정너처럼 본인이 다 결정하고, 그 대상자 인 나에게는 형식적으로 묻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다 보니, 엄마가 물어보는 것에 건성으로 대답할 때가 많다. 어차피 괜찮다고 해봐야, 필요 없다고 해봐야 통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엄마와 나, 모녀간의 마음은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할 뿐이다. 어차피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알 길이 없으니 그저 그러 려니 하고 지나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모나고 예민한 나는 그게 참 어렵다. 그렇다고 나이 마흔 넘어 엄마와 이런 일로 싸울 수도 없다. 엄마가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게 속상한 사춘기 소녀처럼 영영 남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엄마도 나를 모르고, 나도 엄마를 모른다. 이런 게 부모 자식 사이의 일반적인 관계 설정 같다. 오죽하면 “내 부모도 내 마음을 모르고, 내 자식도 내 마음을 모른다.” 는 말이 있을까.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기대했고, 많은 자식들이 부모에게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충족되지 못했다. 어쩌면 영영 충족될 수 없는 게 바로 부모 자식 관계 아닌가 싶다. 서로가 가장 가까우면서도 알 수 없는 관계, 그래서 불편하면서도 안 볼 수 없는 사이가 바로 부모와 자식인가 보다.

서로가 서로를 모른 체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부모와 자식 일인 가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모녀관계의 번아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