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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스 Nov 03. 2021

모녀관계의 줄다리기에서 끈 놓기

엄마와의 관계가 늘 갈등 상황인 것, 엄마의 말과 행동이 나를 뒤흔들어 놓는 것은 결국, 내 안에 이유가 있다. 반복되는 상황들을 곰곰이 되짚어보고 내린 결론이다.


 나는 여전히 엄마에게 무언가를 원하고 기대한다. 내가 바라고 기대하는 엄마의 상이 있다. 나를 이해해주고, 나의 말을 들어주고, 내가 터놓지 못해도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 그런 존재를 엄마로 상정해 놓고 있다. 현실의 엄마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엄마가 나쁜 사람 이어서도 아니다. 엄마는 자식을 위한 마음만큼은 여느 엄마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엄마다. 나는 아직도 엄마가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40년 넘게 엄마를 봐왔으면서 나는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엄마의 모습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엄마는 엄마 로서의 입장이 있고, 나는 나대로의 입장이 있다. 이 단순한 사실을 나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사실상, 내가 원하는 감정과 행동을 보여주지 않는 엄마를 나는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얽히고설킨 관계의 실타래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엄마에 대한 나의 불만과 갈등은 세대 간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도 물론 있다. 세상을 보는 관점과 생각이 다르다는 전제를 두어야 한다. 그렇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각자가 자기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데, 상대방이 어떻게 보는지 짐작만 할 뿐, 알기 어렵다. 이런 차이는 좁히기 어렵다. 이런 차이는 인정하고 넘어가야 한다.


이 문제를 풀기위해서 먼저 내 안에 굳건히 박혀버린 엄마에 대한 잘못된 기대를 놓아야 한다. 엄마에게 받으려는 마음을 놓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주기보다는, 받기 원하는 심리가 있을 거라고 본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갈등의 핵심은 엄마와 내가 서로에게 받기만을 원한다는 것이다. 내가 엄마에게 바라고 기대하는 바는 충족되지 않는다. 엄마가 내게 인색하거나, 냉정 한 것도 아니다. 엄마는 내게 끊임없이 주려고 한다. 문제는 엄마가 주는 것이 내가 받고 싶은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정서적이든, 물질적이든 엄마는 내가 원치 않는 것을 준다. 독립된 나로 인정받기 원하지만, 한결같은 과잉보호로 나를 대하기도 하고, 내가 어려울 때 기대고 싶지만, 엄마는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기에 급급하다. 이렇게 엄마와 나의 관계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줄다리기 같다.


 나이가 들어도 나는 여전히 엄마에게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데, 엄마는 늘 나를 의지하려고만 한다. 누구든 내가 원하는 것을 더 얻으려고 하지 내 것을 누군가와 나누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심리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넘어서서 누군가에게 나누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그런 사람을 매우 높게 여긴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더 가지려고 하지, 더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와의 관계에서 누군가는 받고자 하는 마음을 놓지 않는 한 이 감정의 줄다리기는 끝날 수 없다.


 그렇다면 엄마에게 받고 싶고, 기대고 싶은 이 감정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인정하고 용납하되 채우려 들지 않아야 한다. 받고 싶은 마음을 놓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긴 어렵다. 받고 싶은 그 마음을 천천히 조금씩 덜어내 보는 것이다.


내가 성인이 된 후에도 이런 의지하고 기대고 싶은 감정이 남아있다는 것은, 그 감정이 채워져야 할 때 채워지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실제로, 나는 학창 시절 부모의 부재와, 돌봄의 부재를 겪었다. 피치 못할 상황이 있었다. 부모님은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부모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때, 나는  도움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내가 싼 도시락을 먹으며 고3 시절을 보냈다. 심리적 허기가 남아있을 수는 있다. 다만, 그때 남겨진 허기를 채워야 한다는 강박에서는 이제 벗어날 때가 왔다.


 내가 받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엄마와의 관계는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시간이 갈수록 연로해지는 엄마는 자식에게 더 의지하고, 자식의 관심을 갈구한다.

 엄마에게 “힘들다, 몸이 아프다.”는 말이 부쩍 잦아진다. 짧은 문자에서도, 내 안부를 묻는 것 같지만, 사실 본인의 힘듦을 토로하는 내용이 더 많다. 그렇게 엄마는 자신을 돌봐 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엄마도 받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는 것을 이제는 공공연히 말씀하신다. 나와 엄마 둘 다  주고 싶은 마음보다, 받고 싶은 욕구가 크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똑같은 필요를 가진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같은 것을 원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를 원망하게 되거나 관계는 깨어질 수밖에 없다.


엄마와 내가 감정의 줄다리기를 하는 내내 그 끈은 팽팽하게 서로를 향해서 잡아당겨져 있다. 어느 누구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면, 그 팽팽한 줄은 언젠가 끊어질지도 모른다. 과거에 남겨진 그 심리적 구멍들은 여전히 내게 보상을 요구한다. 안타깝게도 그 구멍은 채워질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느끼는 심리적 허기는 포기되어야 마땅한 감정이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 무엇보다, 그런 돌봄과 양육이 더 이상 내게 필요치 않다. 필요치 않은 것을 원할 이유는 없다. 과거에 연연하며 피해의식에 빠진 나를 이제 건져 올릴 때가 됐다. 내 안에 생겨난 심리적인 구멍은 채워질 기회를 놓쳤다. 그렇다고, 살아갈 수 없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구멍을 보며 허기를 느낀다. 이제는 새로운 곳으로 발을 옮겨야 한다. 받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은 이제 그만 멈춰야 한다.


엄마에게 받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했다고 해서, 그 오랜 욕구가 금방 사그라들 것인가는 알 수 없다. 다만, 엄마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 팽팽한 신경전에서 소모되는 에너지는 좀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로 가뜩이나 외출을 못해, 살은 찌고, 체력은 점점 떨어진다. 헛된 일에 마음을 쓰며 힘들어하기보다는, 현재에 충실하며 그에 맞는 감정을 갖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간혹 엄마가 나의 관심과 돌봄을 간절히 원한다면, 그때마다 나 자신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감정을 나누는 것이다. 나는 그리 이타적이지도 못하고, 평범하기 때문에 과도하게 줄 수 없다는 사실도 잊지 않을 것이다. 내 감정이 부족해서 고갈되지 않을 만큼의 관심과 에너지를 사용할 것이다. 관계의 균형을 지켜 나가는 일이 힘들기 때문에 어찌 될지는 모르겠다.


 받고자 하는 마음을 이제 접어본다. 더 이상 엄마를 내게 빚진 사람으로 여기지 않기로 한다. 과거의 시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났던 일들을 이제는 추억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조금이라도 더 얻어가고 싶어서 늘 잡아당기기만 했던, 관계의 팽팽한 끈을 슬며시 놓아본다. 내가 원하는 기대에 욕심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 욕심을 흘려보내고 포기할 궁리를 해본다. 말처럼 쉽다면 참 좋겠지만, 그래도 나 자신을 아끼고 지키는 길을 향해 방향이라도 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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