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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스 Aug 06. 2024

막장 드라마같은 고전<여인의 초상>

ebook 리더기에서 구매도서 리스트를 보다가 한참 전에 사두고 안 읽은 책을 발견했다. 산 책은 다 읽어치우자는 주의를 가진 나로서는 그냥 넘기기 어려운데, 하필 그 책이 고전인 경우는 정말 피하고 싶다. 게다가 그 책이 상, 하로 나눠진 경우는 더욱 그렇다.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 옛날 작가들은 시간이 많았던 걸까. 왜 이렇게 길게 쓰는 것일까. 책을 펼쳐보니 천 페이지 분량이다. 20초짜리 숏폼에 익숙해진 내 뇌는 갈등한다. 독서의지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그러다 그냥 읽어치우자는 단순한 생각으로 결국 첫 페이지를 넘긴다.

      

헨리 제임스는 현대 심리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작가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말은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 (헨리 제임스의 형)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사람의 정신 속에서는 생각과 의식이 끊어지지 않고 연속된다는 것을 가리킨 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후 이 용어는 소설의 한 기법으로 자리 잡아 후에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과 같은 소설에서 확장된다.


작가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헨리 제임스의 소설은 “사물을 발견하려고 애쓰지 않으면서 오로지 허무한 이야기들만 만들어내는 작가”라는 혹평을 받기도 한다.      


19세기 귀족사회의 삶이라는 소재는 처음에는 그리 흥미롭지 않다. 파티나 무도회를 열고 산책하고 여행이나 다니는 이들의 삶은 지루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말투는 어떤가. 핵심을 건드리는 법 없이 고상하면서도 우회적인 대화들, 진짜 뜻은 마음속 깊이 숨겨두는 사회적 매너로 무장한 이들의 대화는 답답하며 적응이 어려웠다. 지구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 시간을 넘기면 작가는 어떠한 형태로든 보상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독자는 페이지와 싸워나가야 한다. 그런 시간을 거치며 초반부를 통과하자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이사벨 아처는 아름답고 명민한 미국인 아가씨다. 세 자매 중 막내로 언니들은 모두 결혼한 뒤 홀로 아버지와 살았다. 어머니에 이어 부친마저 세상을 뜨자, 고아나 다름없어진 이사벨은 오랫동안 연락을 단절했던 이모 터치드 부인을 통해 영국으로 오게 된다. 터치드 부인은 죽은 동생의 딸인 이사벨을 양녀처럼 여겨 곁에 두고 함께한다. 그 와중에 사촌오빠인 랠프와 만나게 되고, 영국 귀족 워버턴 경에게 청혼받게 된다. 아름답고 명랑한 이 아가씨는 지극히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청혼해 오는 남자들의 청혼을 완강히 거부한다. 그러던 차에 이모부 터치드경이 사망하면서 이사벨에게 막대한 유산이 남겨진다.


사실 이것은 이사벨을 아낀 사촌오빠 랠프가 아버지에게 부탁하면서 이루어진 일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부유한 남자와의 결혼을 강요받는 이사벨에게 자유를 주고 싶은 사촌오빠의 깊은 배려 덕분이었다.  

   

부유한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삶의 안정을 찾으라는 이모의 압박에 굴하지 않은 이사벨은 자유로운 삶을 고수하다가, 홀로 딸을 키우며 미술품 수집을 하는 남자 길버트 오즈먼드를 만나게 된다.


 오즈먼드는 가진 게 고미술품과 딸뿐인 빈털터리의 남자이지만, 완벽한 매너를 갖추고 여자의 마음을 쥐락펴락 할 줄 아는 남자다.    

 

여기에는 한 가지 계략이 숨어 있었다. 이모의 친구이자 이사벨과 가까워진 마담 멀이 길버트와 짜고 이사벨이 길버트와 결혼하도록 일을 꾸민 것이다. 부유한 정치인 귀족과 젊은 사업가의 청혼까지 거절한 이사벨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길버트에게 사랑을 느낀다.


이 지점에서 독자는 무척 당황하게 된다. 이 무슨 답답한 전개인가. 똑똑한 이사벨이 왜 하필 이런 사기꾼은 알아보지 못했을까. 훌륭한 신랑감들의 끈질긴 구혼은 뿌리치고 이런 남자에게 끌렸을까.     


주인공의 행복한 결말을 기대한 독자에게 작가는 배신감을 안긴다. 대체 이사벨은 언제 행복해지는 건가. 곤경에 빠진 이사벨의 인생은 행복한 결말을 향할 수 있을까. 이사벨은 언제 이 음모를 깨닫고 각성할까. 이어지는 질문과 궁금증 덕분에 나는 문장을 닦달하다시피 읽어나갔다. 이 부분부터 나는 핸드폰과 OTT를 집어던지고 이사벨 아처의 이야기에 전념했다. 이사벨 아처의 불행한 결혼생활이 시작되는 하권 역시 오백페이지가 넘어가지만, 나는 실로 오랜만에 페이지를 재촉해 가며 책을 읽었다.


주인공을 이런 불행에 빠뜨리다니.!! 주인공들을 서슴없이 죽이는 미드나 영드를 한 두 번 본 게 아닌데도, 나는 작가가 쳐놓은 덫에 빠져 작가를 원망하고 분개했다. 더군다나, 글로 읽어가며 이사벨의 심리를 따라가는 것은 영상을 보며 갖는 집중력에 버금가는 몰입도를 가져왔다. 이사벨의 재산만을 탐내고 접근한 뻔뻔한 악당 길버트와 그의 조력자 마담 멀 까지  이들의 결말이 궁금해 견디기가 힘들었다.

    

이사벨은 결혼 후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편과는 단 한 가지도 맞지 않는 부부로 살면서 서로를 빈정대고 반대하는 일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유일한 일이 되었다.


더구나, 오로지 재산에만 관심이 있는 길버트는 이사벨에게 청혼했던 귀족 워버턴 경이 자신의 딸에게 관심을 보이자 두 사람의 결혼을 추진하려고 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던 길버트의 딸은 귀족과의 결혼을 원치 않고 이를 알게 된 이사벨은 이 결혼을 막으려 한다.


이 과정에서 길버트의 딸을 낳은 사람이 마담 멀이라는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된다.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놓지 않은 이사벨은 어떤 선택을 할까.     

작가는 여기서 소설을 마무리 짓는다.


세상에 이런 막장 드라마를 고전에서 만날 줄이야. 세상에 고전이 이렇게나 흥미진진하다니. 이런 열린 결말은 대체 뭐지? 이해 안 되는 영화나 드라마처럼‘<여인의 초상> 결말해석’을 검색할 뻔했다. 작가 참 대단하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쓴다더니, 독자의 의식도 쥐락펴락한다.


헨리 제임스는 드라마 작가 뺨치는 이야기꾼이었다. <여인의 초상> 각색해서 현대판으로 드라마화하면 사람들이 ‘작가 대체 누구야’를 연발할 것이다. <여인의 초상>을 읽는 분들에게 고전이 재미없다는 말은 통용되지 않을 것 같다. 1916년에 사망한 작가가 아직 살아있다면, 후속 편을 써달라고 애원하고 싶어질 것이다.      


지루한 귀족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엇갈리고 꼬여버린 사랑 이야기였다. 진정한 사랑을 찾는 이들의 이야기는 시대를 관통하며 다가온다. 더구나 잘 고안된 이야기, 근사하고 황홀한 문장으로 덧입은 이야기는 사람을 매혹시킨다.

아무리 오래된 이야기라 하더라도 아무리 진부한 형식을 갖고 있다 하더라고, 뛰어난 작가는 독자와 등장인물들을 연결시키고, 공감하게 만든다.


헨리 제임스는 그런 면에서 무척이나 뛰어난 작가 같다. 지구력 있는 독자들에게 도전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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