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악, 지옥 (4)
모든 동물들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
⟪동물농장⟫, 조지 오웰
오웰의 명저인 ⟪동물농장⟫에서 권력을 잡은 돼지들은 공동체 모두가 지켜야 할 칠 계명을 선언하는데, 그중 일곱 번째 계명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All animals are equal)"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특권을 누리는 동물과 그렇지 못한 동물이 갈리게 되자, 그들은 기가 막힌 문구를 뒤에 첨가하는데 바로 "하지만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but some animals are more equal than others)"입니다.
이는 타락상의 본질적인 측면인 '왜곡(歪曲)'을 보여줍니다. 왜곡은 똑바르지 않고 '기울어져 있다'는 뜻을 함의하며 대부분 사실과 거짓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문제는 명제의 대부분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일부가 거짓이 되는 순간 전체적으로 그것이 거짓된 진실로 오염된다는 것입니다. 논리학적으로 Partial Truth 또는 Half-truth가 부르는데, 상대방을 기만하거나 선동하기 위한 최적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창세기⟩에는 역사상 첫 번째 왜곡이 등장합니다. "거짓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탄, 곧 뱀의 교묘함은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야훼 하나님의 말과 대조해서 보아야지만 그 '악마의 편집'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야훼 하나님과 뱀, 그리고 그것에 응답하는 여자의 말에서 미묘하게 달라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마음대로 먹되 (하나님) ->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하나님) ->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여자)
먹지 말라 (하나님) ->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여자)
반드시 죽으리라 -> 죽을까 하노라 (여자) ->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뱀)
선악을 알게 된다의 의미 : 타락 이전에는 악을 모르는 선한 상태이지만, 범죄를 저지르면 악이 발생하여 선악을 알게 됨 (실상) -> 선악을 분별하는 창조주처럼 존귀한 존재가 된다(뱀의 발화 의도)
뱀의 간사함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어긋난 대답을 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뱀은 교묘하게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섞어서 상대방의 불확실한 인지를 공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고의적으로 편집하여 왜곡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여자와 그와 함께 있던*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제대로 새기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대답이 하나님의 말씀과 약간씩 어긋남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치밀한 빌드업을 통해 빈틈을 확인한 뱀은 마치 사냥감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듯, 결국 완벽한 거짓을 섞어 쐐기를 박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뱀의 왜곡된 거짓말, 그리고 명령을 어긋나게 숙지한 첫 사람의 연약함으로 인해 세상에 첫 죄가 들어옵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원죄'라고 지칭합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죄를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단어는 'חָטָא(하타)'입니다. 헬라어로는 'ἁμαρτία(하마르티아)'로 번역되었는데, 둘 다 매우 유사한 뜻으로 '빗나가다'의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녁의 목표 지점에 맞지 않고 살짝 빗나간 것이 '죄'라고 개념화된 것입니다.
처음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정말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죄의 이미지는 무언가 사회 규범에 정면으로 반하거나, 극악무도한 더러움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죄의 개념이 고작 '어긋나다, 비껴가다'라니...? 목적에서 살짝 멀어졌을 뿐인데 어떻게 그렇게 안 좋은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알아갈수록 사실은 그 한 결의 어긋남이 죄의 본질에 더 가깝다는 것에 이내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대놓고 자기는 나쁜 사람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양아치보다, 세상 선량한 척 다 하는 사이비 교주가 훨씬 무섭습니다. 여러 사람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역사적 범죄들도 약간의 어긋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지상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서 잠깐의 견딤과 조금의 희생이 있을 뿐이라는 달콤한 거짓말이 우리의 이성을 흐리는 그 순간, 가장 끔찍한 범죄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는 이처럼 어긋난 욕망의 연쇄로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여담이지만 죄의 본질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불후의 명작 브레이킹 베드(Breaking Bad)를 한 번은 꼭 시청하길 추천합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모든 단추가 어긋납니다. 왜곡이 죄를 불러온 것처럼 죄는 또다시 왜곡을 불러옵니다. 즉 창세기에 처음 등장한 우리의 죄, 곧 어긋남은 우리 삶의 전반을 비틀어버렸습니다. 이 개념이 중요합니다. 아예 없애지는 않고 비틀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마치 코드 사이를 누비며 전체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버그와 같지요.
전 글에서 언급한 첫 번째 지상명령을 떠올려봅시다. 생육, 번성, 하나님의 질서에 기반을 둔 정복과 다스림의 열망은 타락 이후에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비틀렸을 뿐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생육하고 번성하기를 원하나요? 그렇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에 자취를 남기려는 욕구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자식을 키우는 것도, 누군가와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모두 자기 복제와 확장의 욕망 안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불완전하거나 심지어 역겨운 형태로 그런 욕망이 발현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죠. 물론 이것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지속된 어긋남입니다. 루소가 ⟪에밀⟫에서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여전히 정복하고 다스리기 원할까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고도의 정치행위나 제도권 또는 문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름의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연적 욕망입니다. 설사 방을 정리하거나 정원을 가꾸는 일처럼 소박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질서에 대한 열망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복과 다스림은 이미 오염된 경우가 태반입니다. 사실 이제 지배와 착취와 결부되지 않은 '정복'을 떠올리기조차 힘들어졌습니다. 끊임없이 자기의 세를 불려 나가고자 환경을 파괴하고, 다른 사람들의 소유를 넘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아무도 보지 않고, 누구도 나를 벌하지 않는다면 나의 이익을 위해 끝까지 나가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우리는 잘 되기를 바라지만, 그 열망은 이제 결코 원래의 온전한 형태가 아닙니다. 선악을 알게 된 사람은 "자기가 벗은 줄을 알고",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습니다. 죄를 저지른 사람은 더 이상 '절대선'과 마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절대선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벗은 몸일 뿐입니다.
*매우 밀접한 지근거리를 나타내는 단어가 쓰인 것으로 보아 옆에 같이 있던 것으로 볼 수 있음(양진일)
+ 덧붙이는 사색
이러한 뒤틀림은 신의 본래 목적에 맞는 질서가 아닙니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의 원초적 코드에도 일정 제약이 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면에서 저주이기도 하지만, 신적인 질서가 아니라 '죄의 질서'가 번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이기도 합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우선 성경은 임신으로 인한 고통의 시작을 이 시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생육과 번성에 가해지는 제약입니다. 임신 및 출산에 지금과 같은 제약이 없었다면 인류는 훨씬 더 빠르게 퍼져나갔겠죠. 이러한 여성의 생물학적 취약점과 동반하여 가부장제의 원형 또한 나타나는 것이 미묘합니다.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에서 쓰인 "다스림"은 이전 글에서 다뤘던 것처럼 통치권의 범위를 알려주는 단어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배-의존의 구조를 나타내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타락 이전에 주어진 지상명령으로서의 다스림이 신의 질서를 확립하는 '좋은' 다스림이라면, 타락 이후에는 사람과 사람 간에 불평등한 구조가 성립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해석은 중요합니다. 복종 의무를 강제하는 명령이 아니라, 현실적 변화에 대한 선언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여담이지만 진화생물학자들은 인류의 특징으로 나타는 이족보행과 두뇌의 비대화가 여성의 임신 및 출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사람'으로 지칭되는 첫 인물들이 임신 및 출산의 고통과 결부되어 설명된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다음으로 아담에게는 "땅이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기존의 지상명령이 땅을 "정복"하여 신적 질서 아래 통치권 아래 두는 것임을 생각했을 때, 이와는 반대되는 언명입니다. 타락으로 인해 더 이상 신적 질서를 확립할 수 없게 되자, 자연스럽게 저주가 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생명 나무 열매 또한 따먹지 못하게 되며 사람이 영생할 가능성을 박탈당합니다. 타락 이전에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그 자체로 지상명령을 이행하는 선이 되었지만, 죄인이 된 이후에 영원한 삶은 오히려 그 우주적 질서를 침해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둘은 에덴에서 쫓겨나는데, 이는 다른 한편으로 모든 생물에 대한 다스림 또한 이전 같지 못함을 알려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고대 사회에서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곧 상대방을 다스린다는 의미였습니다. 에덴에 있을 때는 아담이 부르는 것이 곧 그 생물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에덴에서 쫓겨난 그에게 그러한 다스림의 자리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변화는 기존에 주어진 생육, 번성. 정복, 다스림이 본래의 목적에 맞게 실행되는 것이 불가능해짐으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 사실 죄를 지어 신의 선함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며 정복하고 다스린다면 더 큰 악을 불러오기 마련입니다. 인류가 멸절하지 않고 살아남아 왔기에 우리는 그 악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제약들은 저주 그 자체라기보다 우리의 뒤틀린 욕망이 악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신의 안정장치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의 형상이 온전한 것으로 회복된다면 없어져도 무방한 제약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