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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생올리브 Jul 15. 2024

악의 기원

죄와 악, 지옥 (5)

현기증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아래의 공허가 유혹하고 끌어당기는 목소리이며, 우리가 공포에 질려 저항하는 추락에의 욕망이다.

더 높은 무언가를 목표로 하는 사람은 언젠가 현기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죄의 문제를 다루자마자 ⟨로마서⟩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고통스러운 순간을 얼른 벗어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니깐요. 에덴에서 시작된 왜곡의 악순환을 끊어내고 자유와 평안을 얻는 그 지점에 도달할 때의 해방감을 알고 있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사실 조직신학적인 관점에서는 죄에 이어 바로 복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것이 일반적 흐름이기도 하고요. 


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보다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서는 사실 더 많은 맥락의 복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뒤에야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도 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가 타락할 것을 알고도 창조하셨을까? 

하나님은 선하시고 예수님은 우릴 구원하셨다고 하는데 왜 세상에는 아직도 악이 넘쳐날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살인자도 죽기 1초 전에 예수님 믿어요 말하면 구원받나요? 

하나님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한국교회 토양에서는 죄의 회개와 내세의 구원이 너무나 강조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지금의 교회의 성장세를 만들어낸 원동력이기도 합니다만, 이제는 보다 교리 주입의 방식을 벗어나 보다 입체감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살아 움직이는 복음이 되기 위해서 말이죠. 제가 거기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써나가 보렵니다.




성경을 엄밀하게 뜯어보면 죄와 악의 문제는 구분됩니다. ⟨창세기⟩로 돌아가볼까요? 인간을 타락시킨 뱀은 처음부터 거짓말하는 존재였습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부터 이미 사람을 타락시키려는 존재가 있습니다. 사람의 '죄'가 있기 전에 이미 '악'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좋은" 창조세계에 어떻게 벌써 악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신정론'이라고 불리는 유구한 신학적, 철학적 논제와 연관됩니다. 저도 한 때는 논리적으로 신이 왜 정당한가에 목매던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대한 관점이 정립된 이후에는 그런 접근법과는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성경은 내재적 논리를 택할 때 완성된 설명력을 가지도록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 내재적 논리는 신의 창조와 구원으로 표출되는 사랑입니다. 창조사와 구속사의 관점이 아닌 다른 시선을 가지고 읽을 경우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수학 교과서를 문학 작품처럼 접근하면 어떻게 될까요. 판소리의 풍자를 실제 범죄처럼 프로파일링 한다면요? 각자가 가진 선악의 기준을 바탕으로 성경의 옳고 그름을 분석하는 것은 이러한 오독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사실 성경에서는 스스로 '선악을 분별하는' 자리에 앉는 사람(선악과를 먹은 사람)의 모습을 가장 경계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외부의 근거를 통해 접근하면 안 됩니다. 해당 근거들은 성경 내부적 논리를 둘러싼 '맥락'을 밝혀내는 한에서 보충자료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결국 성경에서 표출되는 선과 악에 대한 설명 그 자체는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하는 양자택일의 명제입니다. 첫 편에서 밝혔듯이, 이것은 가치관 선택의 문제이지 논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성경에서 죄와 악은 어떻게 구분되고 있을까요? 투박하게 표현하면 악은 가능태를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죄는 현실태로서 나타납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서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뒤집어보면, 욕심의 단계는 아직 '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방향성은 죄를 향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악하다'라고 볼 여지가 크죠.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 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따 주었다. 남편도 받아 먹었다.

⟨창세기⟩, 공동번역

사람이 최초의 죄를 짓기 전 상태에서도, '욕망'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싶다는 욕망, 그것을 보고 싶다는 욕망, 지혜로워지고 싶다는 욕망이 하나로 얽혀서 죄라는 행위로 이끌고 있습니다. 원죄를 짓기 전이기 때문에 이 욕망을 중립적으로 보는 의견도 있지만, 저는 이것을 '악'으로 보는 견해에 동의합니다. 바로 아래 본문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자 뱀이 여자를 꾀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창세기⟩, 공동번역

선악과에 대한 욕망의 방향성은 선의 근원인 하나님의 명령과는 다른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먹지 말아야 될 것이 먹음직스럽게 느껴지고, 탐스럽게 보이고, 지혜를 줄 만큼 유익하게 생각되는 것은 욕망의 기저에 '신처럼 되고 싶은' 동기가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욕망이 일어나는 것 자체는 악이 아닐지라도, 그 욕망이 겨누고 있는 방향이 '악'에 해당됩니다.


저는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악'의 첫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악의 화신인 루시퍼의 타락도 우연찮게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이 부분이 루시퍼의 탄생설화에 해당하는지 또 '계명성(루시퍼)'에 대한 번역은 올바른지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다만 관련 논의는 생략합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이사야⟩, 개역개정

본래 높은 자리에 위치해 있었던 천사장은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라는 욕망을 가진 순간 타락하게 됩니다. 즉, ⟨요한계시록⟩에서 "옛 뱀"으로 지칭되는 사탄 또한 '하나님 처럼 되고 싶은 욕망'으로 인해 탄생한 것이죠.


이렇게 보면 '악'은 행위의 차원을 넘어서는 보다 근원적인 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원죄를 지은 것은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그 죄를 저지르게 하는 욕망이 생길 가능성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욕망을 일으키는 근원샘은 '신처럼 되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흔히 교만을 최고의 죄로 지칭하는 이유가 이것이죠. 교만은 하나의 죄이기 이전에 영적인 타락의 상태 그 자체입니다. 단순히 스쳐가는 생각이나 일시적인 마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갈망'의 형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 전위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만약 교만이 개념상으로 죄와 악 사이에 존재한다면 그 거리는 악과 훨씬 가깝겠습니다.







+

죄와 악을 대하는 하나님의 대처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은 혹시 이런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왜 하나님은 사람은 구원하시면서, 사탄은 구원하시지 않을까? 죄와 악의 차이점에서 그 이유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죄'를 지은 것으로 그려지지만, 사탄은 '처음부터 악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또 '죄'는 행위를 통해 저질러진 잘못이자 목적에서 빗겨나간 연약함으로 이해되지만, '악'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반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죄인과 사탄 중 죄인만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선과 완전히 결별한 오만함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죄인은 회개하면 용서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나 악한 존재, 그리고 그와 동조하는 악인은 애초에 회개할 수 없습니다. 악하다는 개념 자체가 하나님과 갈라서는 그 반항성을 핵심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반항하는 대상에게 굴복하는 것은 모순 그 자체입니다.


완전히 도식화될 수는 없지만, 성경을 잘 살펴보면 죄와 악에 대하여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베드로전서⟩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에서 "죄"를 '악'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악을 덮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불의에 침묵한다는 느낌을 주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또 시편을 비롯한 대부분의 성경 본문에서 '악'과 '악인'의 상대항은 거의 공의와 심판의 대상인 반면, 죄의 상대항으로는 종종 사랑,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보이곤 합니다. 특히, 신약에 도달하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더욱 잘 드러나게 되지요. 수많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습니다. 반면 악과 악인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은 일시적으로 유보될 뿐이지 결코 소거되지 않음이 마지막 성경 ⟨요한계시록⟩에서 계시됩니다. 이러한 상대항의 차이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죄 ↔︎ 제사/구원

죄인 ↔︎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의 사랑/ 자비와 긍휼

악 ↔︎ 공의/심판/보응/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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