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악, 지옥 (6)
진정한 철학자와 철학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듯이, 존재와 영원한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인 척하는 가짜들이 생겨 (이들과 구별하고자) "진정한"이라는 말을 철학자 앞에 덧붙인 것과 같은 이유로, "영원"과 "존재"를 서로 결합하여 "영원의 존재"라는 동의어 반복을 사용한다. 실상 "영원"이 참존재이다.
⟪엔네아데스⟫, 플로티노스
전편에서 악의 기원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왜 악으로 귀결되는 것일까요? 기독교 세계관에서 하나님은 모든 선함의 근원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은 선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부모를 닮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잘못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흥미롭게도 다른 질문으로 같은 의문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사과도 아니고, 무화과도 아닙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죠. 그런데 이 '선악에 대한 앎'은 실제로 어떤 지점에서는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었습니다(창세기 3:22). 이 두 사실을 종합하면 선악과에 대한 금지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금지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도적인 금지입니다. 애초에 선악과를 창조하지 않는 선택지도 있었건만, 하나님은 굳이 선악과를 창조하시고 금하셨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성경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회피하고 있을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느끼기에는 성경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있는 책처럼 느껴집니다. 다만 성경의 전체적인 구조를 이해하지 않으면 이 질문에 결코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을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우선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고, 인간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지 알아야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었다"라고 말씀하신 분은 '주 하나님(LORD God)'이십니다. 여기서 '주(LORD)'는 야훼(여호와, Yahweh, YHWH, Jehovah)를 지칭하고, 하나님은 '신'이란 뜻입니다. 즉, '주 하나님'은 '야훼 신'의 번역인 것이죠. '신'의 개념은 비교적 이해하기 쉬우리라 생각합니다. 전능자, 절대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죠. 그렇다면 야훼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출애굽기⟩에 야훼 하나님의 이름의 유래가 등장합니다.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그것이 곧 야훼의 의미입니다.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 "있게 하는 자(창조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야훼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신", "창조하는 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스스로 있는 신"의 의미로 생각해 봅시다. 이름은 다른 대상과는 다른 고유한 정체성을 나타내는데 쓰이죠. 그렇다면 야훼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데에 반해, 다른 대상은 그렇지 못한다는 것을 반대해석해 낼 수 있습니다. 창조주가 아닌 대상이 모두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요? 바로 스스로 있는 존재에 의존해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 존재는 자존자께 삶을 의탁하는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진정한 의미의 '존재'는 창조주 하나님뿐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와 관여, 파르메니데스, 신플라톤주의의 일자 개념을 떠올리신 분들은, 왜 교부철학이 플라톤주의를 쉽게 수혈했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창조하는 신"의 측면에서 살펴봅시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은 곧 상대방에게 지배당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상대방을 규정하는 행위입니다. 내가 규정하고 인식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상대방이 나의 틀 안에 있다는 점을 의미했던 것이죠. 조선시대에서 왕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관습, '피휘'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야훼라는 이름 자체가 문법적으로 미완료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규정할 수 없는 존재로 등장하는 것이죠. 한정되지 않고 초월합니다.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생성되는 방식으로 살아있는 창조의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창조는 피조물의 탄생으로도 이어집니다(이 부분은 또 어떻게 보면 헤라클레이토스가 떠오르지 않나요?).
따라서 야훼 신과 인간은 자존-의존의 관계 또는 생성-피조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다' 욕망은 바로 이러한 전제를 염두해서 판단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신에게 의존하는 상대자가 독립적 존재로 서고자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곧 자신의 근원을 끊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뭇가지가 뿌리 없이 스스로 자립하고자 한다면, 이는 곧 마른 불에 던져질 뿐입니다(요한복음 15장). 의존하는 형상으로 존재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존자의 위치에 오를 수 없습니다. 존재로부터 멀어지면 사망이, 선으로부터 멀어지면 악이 됩니다. 때문에 인간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신의 권좌에 오르고자 하는 것이 곧 사망과 악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또, 창조하는 신의 지위를 넘보는 순간, 피조물은 창조의 동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창조의 양분을 제공받지 못하므로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간혹, 신의 형상의 편린이 열매와 유사한 것을 창출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것은 곧 사라져 버리는 이슬과 같습니다. 영원에 해당하는 열매는 창조하는 신을 통해서만 맺어질 수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고자 한다면,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가 부모를 대신하여 그 지위를 얻겠다고 하면 그것은 패륜이 됩니다. 만약 최초 사람의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이 하나님의 인격을 닮고자 하는 사랑이었다면, 그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과 진리의 기준임을 인정하고 그분이 만물의 주재이심을 선포한다면, 사람은 그 통치권 아래서 '복' 또한 상속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의 기준을 통해 선악을 판별하는 위치에 서고자 하는 방향으로 교만을 저지른 순간,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됐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인격으로 '충만'하신 분이기 때문에 인격과 별개로 자신의 지위와 권력만을 넘길 수는 없습니다. 무한한 사랑의 인격을 외면하고 오로지 그 '지위의 빈 공간(Placeholder)'를 탐한다면, 무한한 상실감만을 맛볼 뿐입니다.'신처럼 되는' 욕망이 저주로 변하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는 조물주와 피조물 간의 철저한 구별을 대전제로 삼습니다. 선악과의 창조 목적은 이러한 위계관계를 끊임없이 되새기도록 하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선악과는 에덴에서 인간이 엄청난 복을 받아 누렸지만, 그것이 인간이 대단하거나 스스로 뛰어나서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나타내는 계시의 일종입니다. 선악과의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창조질서의 기원을 상기하고, 선악과를 먹지 않음으로써 그 질서 안에의 온전한 포섭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신화 일반에서 아버지는 곧 질서를 대표하죠. 그렇기에 부친살해(patricide)는 기존 질서의 붕괴와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상징합니다. 크로노스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한 제우스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부친살해의 알레고리는 성경에서 엄격히 배제됩니다. 그것은 성경이 단 하나의 질서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는 창조적 질서가 존재하는 유일한 체계이자 우주의 근본원리로 언명됩니다. 이 질서에서 바깥은 없습니다. 성경은 심지어 사탄과 악마조차 하나님의 '섭리'라는 거대한 질서 체계 아래 둡니다. 북유럽신화처럼 악이 선과 대등한 실체로 싸우는 것이 아니죠. 야훼 하나님은 세계 만물에 충만히 편재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주관합니다.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편 137편 12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태복음 5장 45절)".
교황권(Papacy)은 아버지(papa)와 질서(archy/acy)의 합성어이죠. 아버지 하나님의 권위를 이어받은 사도 베드로와 사제를 중심으로 창설된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은 사실 '보편교회'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하나의 질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사도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교회의 '반석(=베드로)'으로 삼는 개신교 공동체에서도 이러한 보편적 교회에 대한 관념은 승계되었습니다. 다양한 분파와 개인주의를 이루어낸 교회이지만, 그 중심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중심으로 하나의 신적 질서를 확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창조로부터 이어지는 아버지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물론 철저히 복음에 기반한 이신칭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돌감람나무"의 접붙인 목적이니까요.
이 하나의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 곧 신학적 죄악이 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잘못'이 아닙니다. 통치권에 대한 반발이자, 질서에 대한 반란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국가에서도 내란의 죄는 준엄한 심판에 처합니다. 다른 통치권을 주장하거나, 확립된 주권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여기 해당되게 되죠. 권력은 공동체가 합의하는 하나의 질서와 권위를 공고히 하는 것을 그 존재 목적으로 합니다. 그것은 어떤 체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최초의 금지입니다. 금지는 곧 권력에 의해 규정되는 법이지요. 법이 없이는 위반도 없습니다. 권력의 기원인 하나님은 선악과를 통해 창조주 중심의 우주적 질서, 단 하나의 질서를 선악과에 대한 금지명령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선악과를 먹기 원하셨을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사람이 선악과를 먹을 것을 모르셨을까요? 그것도 아니겠습니다. 앞의 두 명제가 맞다면, 다음 귀결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죄악에 빠질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창조하셨습니다. 고생할게 뻔해서 자식을 낳지 못하는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제가 얻은 신학적 답과 개인적 답이 있습니다. 물론 둘 다 저의 작은 손으로 더듬을 수 있는 극히 일부일 뿐이겠지만요. 이것 또한 묵상을 엮어나가면서 조금씩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