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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생올리브 Dec 02. 2021

살아있는 글 읽기

좋은 글쓰기의 전제조건

1. '글'만의 매력

바야흐로 영상의 시대다. 남녀노소 모두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의 진화 양상을 생각해보면 더욱 명확하다. 키패드는 아예 한쪽으로 치워버릴 수 있게 만들었고, 영상을 보여줘야 될 화면은 점점 더 커졌다. 손가락 몇 번 퉁기면 각종 어플리케이션이 내 취향에 맞는 영상을 떠먹여 준다.


이 첨단기기로 글 소비량은 얼마나 늘었을까. 전자책 시장이 커지고 있다고 한들, 영상 시장과는 애초에 비교할 파이가 아니다. 그나마 많이 소비되는 포털 뉴스는 사실 제목과 댓글이 중심이다. 본문 내용을 차분히 정확하게 읽고 소화하는 사람의 수를 따지자면 더 절망적이다.


글이 이렇게 경쟁력 없는 매체였나? 글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이 분명 있을 터인데 말이다. 우스갯소리로 야설이 포르노보다 훨씬 더 야하다고 하지 않나? 글은 본질적으로 상상력을 자극한다. 영상이 이미 만들어진 세계를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게 해 준다면, 글은 독자가 온갖 감각을 동원해 세계를 직접 만들어내게 한다. 


바로 그 지점이 문제이기도 하다. '노오오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글은 불편하다. 현대인들에게 글이 인기가 없는 이유는, 이 불편을 감수할 만큼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글의 태생적 제약이라고 할 수 있다.




2. 죽어있는 글 읽기

그렇다고 활자 매체가 기피되는 것이 불가피한 현상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글의 참맛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나만의 세계를 창조해보는 기쁨. 그것을 깊이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글의 매력이 불편함보다 훨 못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소수에게는 글이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이유다.


그래서 글을 잘 읽는 게 중요하다. 글 읽기를 잘해야 글의 참맛을 알 수 있고, 나아가 글쓰기도 잘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교육을 통해 글을 잘 읽게 되기는 너무 어렵다. 대표적인 시험인 수능식 독해는 그야말로 죽어있는 글 읽기다. 유명 강사의 말이 아직도 귀에 남는다. '수능 문학은 비문학처럼 기계적으로 읽을 것!', '운문을 산문처럼, 산문을 비문학처럼 읽을 것!'.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글 읽기 습관으로 따지자면 최악이다. 그렇게 글을 읽어서는 절대 글의 참맛을 알 수 없다. 그저 정보를 빨리 습득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저자의 의도를 추측해보고, 나만의 생각을 곁들이고,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보는 경험. 그 느리고 풍요로운 과정이 결여되어있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문명들은 언제나 그 반대로 글을 쓰고 읽었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정수는 시와 연극이 점유했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등의 문학 작품이 당시와 이후에 미친 영향력은 지대하다. 고대 중국 또한 ⟪시경⟫을 통해 유교 사상의 원류를 정립하였다. 이는 우리가 쓰는 단어 '시'의 어원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도 시가 문학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시편⟩, ⟨아가서⟩ 등은 예배와 신앙을 지극히 아름답게 표현한다. 산문의 형태로 되어 있는 부분까지 포괄한다면, 그 범위가 매우 넓다. 모두 글이 유희와 제의의 도구이던 시절이다. 비문학도 문학처럼, 산문도 운문처럼 읽는 그들에게서 낭만을 엿볼 수 있다. 이런 글쓰기, 글 읽기야말로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3. 살아있는 글 읽기

우리 시대에도 살아있는 글 읽기를 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다만 훈련이 필요할 뿐이다. 수험생활은 모두 잊어야 한다. 수능이 아니었으면 분명히 사랑했을 주옥같은 문학작품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나. 시와 문학의 낭만이 삶을 풍성하게 할 수 있도록 그 자리를 열어주자.


우선 글 읽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이것이 제일 어려울 수 있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여유로운 시간이 쉽게 나올 리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너튜브 영상을 보는 시간의 1/5만 할애해보는 건 어떨까. 아마 글의 매력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될 것이다. 가장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 너무 시끄럽지도 쥐 죽은 듯이 조용하지도 않은 카페라든지, 소파 위라든지, 그것도 아니면 따뜻한 날 공원 벤치라든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들고 가자. 문학도 좋고, 비문학도 좋다. 그저 읽고 싶은 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비문학에서 어떻게 낭만을 찾을 수 있나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다. 답은 위에 써놓은 것과 같다. 비문학도 문학처럼 읽으면 된다. 


어떻게 문학처럼 읽을까?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이 글의 모든 걸 잊더라도, 이 한 가지는 기억해줬으면 한다. 바로 글을 연기하는 것처럼 낭송하라는 것이다. 낭송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는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마치 사람들 앞에서 들려주듯이 읽으면 된다. 그래서 '연기하는 것처럼'에 좀 더 방점이 있다. 내가 마치 저자가 된 것처럼, 등장인물이 된 것처럼, 그렇게 연기하면서 읽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별다른 조치 없이도 글이 살아난다. 이해되지 않았던 논리와 감정선, 그 모든 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휘발성이 줄어든다. 어구 하나하나가 가슴에 남고, 오랫동안 기억된다. 지나가는 정보가 아니라, 인생을 바꾸는 한 문장이 된다.


레퍼런스가 필요하다면,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기 바란다. 각종 유명 연설을 찾아 듣는 것도 좋다. 영어에 익숙하다면 좋은 연설이 정말 많다. 성경도 괜찮다면 '공동체 성경 읽기' 어플을 강추한다. 우리나라 배우들이 직접 녹음해서 그 누구보다 더 연기하는 것처럼 낭송해주니 말이다.




4. 살아있는 글쓰기

살아있는 글 읽기는 곧 좋은 글쓰기의 선결조건이다. 살아있는 글 읽기를 해보면, 무엇이 좋은 글이고 안 좋은 글인지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키워진다. 읽었을 때 하나하나 와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깊게 남을 수 있는 글의 조건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평생 살아있는 글 읽기를 하지 못하고, 정보를 획득하는 냉랭한 글 읽기만 했다면 결코 그 실력을 얻을 수 없다. 가독성 좋은 전달용 글을 쓰는 데는 일가견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논문이나 기사와 같은 글조차 궁극적으로는 저자의 숨결과 영감에 의해 화룡점정이 이루어짐을 명심해야 한다. 수작에 해당하는 글은 장르를 불문하고 저자의 호흡이 실린다. 살아있는 글 읽기, 글쓰기를 통해 갈고닦아야 할 능력이다.


물론 내가 글쓰기 마스터도 아니고,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우리나라의 글 읽기, 글쓰기를 보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점에서 모두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말과 수사학이 가장 빛을 발해야 할 정치의 현장과 언론에서 그렇다 할 연설가, 문필가들을 찾기가 어렵다. 어느 장소에서나 발표와 질문이 너무나 어색한 데는, 문학 낭송은커녕 성숙한 토론조차 이루어지지 못하는 데는 다 공통의 원인이 있으리라. 지금이 바로 우리에게 살아있는 글 읽기, 글쓰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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