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쥐팥쥐

거울 속에 두 명의 내가 산다

by 응시

같은 집, 다른 밥상

콩쥐의 어머니가 죽었다. 아버지는 새 아내를 들였고, 새 아내에게는 딸이 있었다. 팥쥐.

두 아이는 한 지붕 아래서 자랐지만, 같은 세계에서 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붕은 같았지만 그 아래의 온도가 달랐다.

콩쥐의 밥그릇은 이가 빠진 사기, 팥쥐의 밥그릇은 새 놋그릇. 콩쥐의 옷은 누더기, 팥쥐의 옷은 비단. 계모는 콩쥐에게 밭을 매게 하고, 물을 길게 하고, 베를 짜게 했다. 팥쥐는 그 옆에서 과일을 먹었다.

설화가 전하는 시련의 목록은 집요하다. 깨진 독에 물 채우기. 밤새 베 한 필 짜기. 쪽박으로 연못의 물 퍼내기. 어떤 것도 인간의 힘으로는 끝낼 수 없는 일들이다. 그때마다 두꺼비가, 참새가, 소가 나타나 콩쥐를 돕는다.

그리고 잔칫날이 온다. 콩쥐는 누더기 차림으로는 갈 수 없다. 그때 하늘에서 — 혹은 죽은 어머니의 무덤에서 — 고운 옷과 꽃신이 내려온다. 콩쥐는 잔치에 가고, 원님의 눈에 들고, 결국 새로운 삶을 얻는다.

팥쥐는 어떻게 되었을까. 대부분의 판본에서 팥쥐의 결말은 잔인하다. 콩쥐를 해치려다 들통이 나고, 벌을 받는다. 어떤 판본에서는 죽는다. 설화는 팥쥐에게 반성도, 변화도, 두 번째 기회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콩쥐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팥쥐를 미워한다. 그런데 정말 그것으로 끝일까.

내 안의 팥쥐를 부정하는 법

융은 인간의 마음에 **그림자(Shadow)**가 있다고 말했다. 그림자란 내가 '나'라고 인정하지 않는 나 자신의 일부다.

이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누구나 경험한다. 회의 시간에 동료가 칭찬받을 때, "잘됐다" 하면서도 속이 불편한 감정. 그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 바로 뒤따라오는 자기혐오 — "나는 왜 이렇게 속이 좁지?" 착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밤에 느끼는 설명할 수 없는 분노. 관대하다고 들어온 사람이 아무도 안 볼 때 보이는 인색함. 이런 것들이 의식의 바깥으로 밀려나 그림자가 된다.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1편에서 말한 것과 같다 — 억누를수록 더 짙어진다. 그리고 밖으로 나갈 출구를 찾는다. 융은 그 출구가 대개 투사라고 보았다. 내가 인정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특정 타인에게서 발견하고, 그 사람을 격렬히 싫어하는 것. 유달리 누군가가 밉다면, 그 감정의 강도 자체가 단서다. "나는 절대 저런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할 때, 그 문장 안에 이미 그림자가 들어 있다.

콩쥐팥쥐 설화는 이 구조의 정확한 형상화다.

콩쥐와 팥쥐는 한 집에 사는 두 자매이지만, 심리적으로는 한 사람의 두 면이다. 콩쥐는 의식이 받아들인 자아상 — 착하고, 인내하고, 불의 앞에서도 원망하지 않는 나. 팥쥐는 그림자 — 탐욕스럽고, 게으르고, 시기하는 나. 설화는 이 둘을 철저히 분리한다. 콩쥐에게는 선함만을, 팥쥐에게는 악함만을 부여한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콩쥐는 정말 한 번도 팥쥐를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자기가 밭을 매는 동안 비단옷을 입고 앉아 있는 팥쥐를 보며, 단 한 번도 분노를 느끼지 않았을까? 새벽에 혼자 베를 짜면서, "왜 나만?"이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오지 않았을까? 설화는 그 감정을 철저히 지운다. 콩쥐는 묵묵히 참기만 한다. 그러나 지워진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

팥쥐의 과장된 악함은, 어쩌면 콩쥐가 느꼈을 감정의 외부화가 아닐까. 콩쥐가 차마 느끼지 못한 분노, 질투, 억울함이 팥쥐라는 인물에 전부 실려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팥쥐는 콩쥐의 그림자다. 콩쥐가 착한 사람이기 위해 잘라낸 자기 자신의 조각.

그리고 설화는 그 그림자를 벌하고 제거한다. 이것이 융이 경고한 그림자 통합의 실패다. 그림자를 마주하고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던져놓고 파괴하는 것. 콩쥐팥쥐 설화가 권선징악으로 깔끔하게 끝나면서도 묘하게 개운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팥쥐가 벌 받는 장면에서 우리가 느끼는 통쾌함 속에는,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대리 처형하는 불편한 쾌감이 섞여 있다.

팥쥐에게 자리를 내어줄 것

우리는 대부분 콩쥐로 살고 싶어 한다. 착하고, 참을성 있고, 결국 보상받는 사람. 그러나 솔직해지는 순간이 있다. 동료의 승진 소식에 축하한다고 말하면서도 속이 쓰릴 때. 누군가의 행복한 사진을 보며 나도 모르게 비교할 때. 부당한 상황에서 화를 내야 하는데, 착한 사람이라는 자아상 때문에 삼키고 또 삼킬 때.

그때 우리 안의 팥쥐가 소리를 낸다.

융은 그림자를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통합해야 할 자기 자신이라고 보았다. 내 안의 질투를 인정하는 것은 질투심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질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지금 질투하고 있구나"라고 인식하는 순간, 질투와 나 사이에 한 뼘의 거리가 생긴다. 그 거리가 선택의 공간이 된다. 모른 척할 때 그림자는 우리를 조종한다. 볼 때 비로소 힘이 줄어든다.

콩쥐팥쥐 설화는 그림자 통합에 실패한 서사다. 그리고 바로 그 실패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다른 결말을 상상하게 한다.

만약 콩쥐가 팥쥐를 벌하는 대신 마주 보았다면. "너는 내가 느끼지 못한 것을 대신 느낀 사람이구나"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설화에는 그 장면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는 가능하다.

당신 안의 팥쥐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그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