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그릇으로 사는 쫄보
나는 '확실한 행복' 중독자다. 중독 증상은 다음과 같다. 언제나 메뉴판 앞에선 한참을 고민한다. 오디션 결과를 발표하는 진행자처럼 말할 듯 말 듯 애를 태우다 주문하는 건 결국 아메리카노 아니면 카페라떼일 때가 많다. 변주를 줘봤자 아이스에서 핫으로 가는 정도. 교통수단도 걷는 길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 출퇴근길도 거의 비슷하게 다닌다. 수학 문제로 치면 최단거리 찾기 문제처럼 움직인다. 배달음식을 시킬 때도 (특히 치킨과 피자를 주문할 때) 프랜차이즈에 대한 신뢰가 굳건하다. 모든 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조심스러운 변화가 뼈아픈 실패로 돌아온 경험의 데이터가 축적되고, 그게 곧 습관으로 굳어진다.
세상엔 무모한 것들이 성공하고 주목받는다. 스마트폰에서 당연했던 키보드를 없애고 혜성처럼 떠오른 아이폰처럼 '자, 어떠냐 우린 반대로 가도 잘 될 거다!' 하는 그런 짱짱한 배포. 반면 자잘한 일상에서조차 확실하고 안전한 행복만 추구하는 나의 작은 그릇이 답답했다. 이렇게 쫄보 같이 살아서 과연 '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확실한 행복안에서 안온함을 느끼면서도 그게 곧 나의 콤플렉스가 되었다.
콤플렉스가 극에 달했을 때엔 별 것도 아닌 모든 것들에 새로운 변화를 줘봤다. 별 것도 아닌 것이 모여 별 것이 되겠지 하는 기대로. 회사에서 루틴 한 업무를 할 때 방법이나 순서를 바꿔본다거나 하는 소소한 변화들. 그러나 늘 시키던 음료가 아닌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초코칩 프라푸치노를 마신다고 난데없이 뭔가 번쩍하진 않았다. 결론적으로는 나라는 그릇을 넓히기에 이런 사소한 노력들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체감하지 못해서 그만두었다.
오히려 루틴한 환경이 익숙하고 안정적으로 일상을 뒷받침해줘야 비로소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할 에너지가 생기는 것도 같다. 이쯤 되니 '세상 어딘가엔 이렇게 변수를 두지 않는 것이 중요한 곳이 있겠지.' 하고 생각해 버리고 있다. 계획을 세우고 데드라인에 맞춰서 꾸준히 반복하고 달성해야 하는 일들처럼 분명 작은 그릇의 쓰임새가 있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편하다.) 앞으로도 여전히 확실한 행복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면, 이왕 이렇게 된 것 쫄보의 장점을 극대화시켜야겠다. 크고 대담한 그릇을 그만 부러워하고 나만의 작은 그릇을 예뻐하고 이것저것 소담하게 잘 담아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