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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비전공자의 예술대학원 도전기

by 아트인사이트


“저 죄송한데, 못 하겠습니다.”


한 예술대학원의 실기 대기실에서,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럼 면접 안내원의 눈이 동그래질 것이고, 지금 나가면 실기 시험에 응시할 수 없는데 괜찮겠느냐고 물을 것이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수험표와 악보집을 쥐고 대기실을 나섰을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실기실에서 흘러나오는 연주를 들으며 떨기만 하던 나는 종소리에 맞춰 대기실을 나섰고, 심호흡을 한 뒤 실기실 문고리를 잡아 돌렸고, 피아노 의자에 앉아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삐끗. 손가락이 멈췄다. 음악이 정지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못 하겠다고 말하고 뛰쳐 나가야 했다. 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연주를 이어 나갔다. 전공생들의 정확하고 단단한 연주를 듣던 면접관들에게 내 엉성한 소리가 어떻게 들릴지를 떠올리니 아찔했다. 2분 남짓한 재즈곡이 끝났고, 나는 면접관들을 향해 돌아앉았다. 관성의 법칙에서 벗어나려던 대가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입안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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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라는 당구대와 마음이라는 당구공


관성의 법칙은 단순하다. 물체는 외부적인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계속 멈춰 있거나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그 관성을 바꾸는 힘이 가속도다. 관성을 탈피하기 위해선 ‘외부적인 힘’이 필요하다. 당구공을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밀어내는 큐대나 또 다른 공처럼.


과학적 설명은 깔끔하지만, 세상이라는 당구대에서 마음이라는 당구공은 그리 간단히 움직이지 않는다. 외부에서 아무리 힘이 가해져도, 내부에서 그 힘을 받아 밀어내는 동력이 생기지 않는다면 마음의 공은 움직이지 않는다. 어떤 공이 와서 부딪혀도, 심지어 큐대로 톡 건드려도 꿈쩍하지 않을 수 있다. 반면에 어떤 공에 부딪히면 예상하지 못한 속력과 방향으로 굴러가기도 한다. 그 공이 또 다른 공을 건드리고, 그 공이 데구르르 굴러 새로운 판의 공을 흔들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가기도 한다.


내게 그 공은 음악이었다. 음악을 전공한 적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는 인문대학 4학년이 예술대학원에 도전한 것도, 음악이라는 공에 맞았을 때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이 마음이 움직여버렸기 때문이다. 분명한 근거조차 대지 못한 채 음악을 썼고, 평소의 나였다면 엄두조차 못 냈을 싸움에 뛰어들었다. 하루하루 부족함에 부딪혔다. 올해 하반기의 가장 큰일이었던 대학원 입시를 마치고, 결과까지 알고 있는 지금, 1년을 더 해야 할지 여기서 멈춰야 할지를 고민하는 갈림길에서도 나는 여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창피, 불안정, 미래의 부재를 견디면서도 계속하고 싶은 이유를. 무엇보다 안정적인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이 힘이 어디서 왔는지, 왜 꺼지지 않는지를.


인간은 이럴 때 본인과 비슷한 길을 걸어간 어떤 사람을 찾는다. 책 <아무튼 무대>의 저자 소개를 보고 멈칫했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저자 황정원은 카이스트에서 과학을 공부하다 음악에 매료돼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에 들어갔다. 이후 예술의전당에서 오페라와 콘서트를 기획·제작했고, 지금은 유럽 무대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그는 과학의 세계에서 공연의 세계로 넘어갈 때의 갈등과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믿음의 도약'이라는 표현이 있다. 믿기 힘든 무엇인가를 믿는 행위, 답을 모르고 성공을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든 믿고 감행하는 일을 말한다. 예전의 나는 이 표현을 보면 절벽 끝에서 맞은편을 향해 몸을 날리는 사람을 떠올렸다. 그 역동적인 이미지에서 다음 수순은 안착 또는 추락뿐이었다. 즉 성공과 실패, 이분법으로 갈리는 두 가지 결말밖에 없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카이스트에서 한예종으로 진로를 틀었을 때 나는 내가 믿음의 도약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적응의 시간을 거치며 도약에 실패했다고 낙심했다. 어쨌든 나는 건너편에 안착하지 못했다. 기껏 뛰어올라 내가 생각해온 곳에 도착하지 못했다니, 이것이야말로 추락이고 끔찍한 실패인 것만 같았다.

지금의 나는 다르다. '믿음의 도약'이라는 말에서 절벽이 아닌 물가를 떠올린다. 비장하게 뛰어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물에 첫발을 담그는 사람을 눈앞에 본다. 절벽이 아니라 넓게 펼쳐진 바다를 앞에 두었다면 물속으로 뛰어들 때 큰 결단이 필요하긴 해도 의외로 할 만하다. 순간적으로 바짝 마음을 굳게 다지면 된다.

- 책 <아무튼 무대>


잠시 마음을 굳게 다지는 것.


그 과정에서 다치더라도, 그 흔적을 토대로 나아가는 것.


예전엔 어릴 때부터 한 분야에 뛰어들어 두각을 드러낸 사람들의 삶을 궁금해 했지만, 지금은 관성에서 벗어나려 한 사람들, 흔적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인 사람들의 이야기.


나의 다음 수순은 안착일까, 추락일까.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내가 내딛은 한 걸음을 증명해줄 것이다. 그 걸음이 또 어떤 움직임을 불러와 어떤 당구공을 치게 될지, 움직이기 전까진 알 수 없다. 이 글도 누군가에게 또 다른 공이, 또 다른 큐대가, 또 다른 움직임이 되어주길 바란다. 관성에 저항하며, 새로운 관성을 찾아 나서려는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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