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대대로 강아지 친화적인 집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내가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까지 다양한 종의 강아지를 계속 키워오셨다. 종을 알 수 없는 소위 ‘똥개’라고 불리던 강아지부터 늠름한 진돗개까지. 어린 내게 할아버지는 사람보다 동물을 더 좋아하시는 듯 보였다.
강아지는 확실히 귀엽다. 앞구르기를 하며 봐도 강아지는 귀엽다. 특유의 발랄한 표정과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상하좌우로 흔들리는 꼬리, 몸짓으로 표현하는 애교까지 총동원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하지만 내게 고양이는 조금 달랐다.
가끔 골목을 지나다 퉁명스러워 보이는 표정의 길고양이를 만나면, 3초 정도 눈치를 보다 길을 빙 돌아 걸어갔었다. 당시에는 그게 기세에 눌렸다고 생각했다. 고양이는 한 마리도 빠짐없이 쫙 찢어진 눈으로 벽에 착 붙어 게걸음으로 걸어가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역시 고양이와는 친해지기 어렵겠구나, 싶었다.
그런 나는 2년 반 전, 작고 귀여운 고양이 두 마리를 만났다. 두 고양이는 지방의 어느 마을에 살던 유기묘가 낳은 새끼 고양이들이었다. 마음 약한 아버지는 두 마리를 냅다 데려오셨고, 그때부터 하얗고 검은 두 마리의 고양이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들의 성장을 지켜볼수록 흥미로웠다.
특히 두 고양이는 어느 시점부터 우리 가족을 의사소통이 가능한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화장실을 다녀오면 배가 고파지니 밥통 앞에 앉아서 밥을 달라고 소리를 지른다던가, 가족들이 모두 각자의 할 일로 바쁘면 의자 옆에 다가와 앉아서 사람을 빤히 쳐다보기도 했다. 몇 번 고양이 울음소리를 흉내 내니, 내 소리에 자기들도 울음소리로 대답하기도 했다.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약간의 자랑을 해보자면, 하얀 고양이는 공 물어오기 놀이가 가능하다. 마치 강아지에게 원반을 던지면 물어오는 것처럼, 이 친구에게 작은 애착 털 공을 던져주면 빠르게 달려가 공을 물어온다. 아기 고양이 시절부터 놀이의 규칙과 공을 물어다 내려놓을 위치를 학습시켰다. 강아지가 따로 없는 수준이다.
까만 고양이는 다소 엉뚱하다. 워낙 순해서 평소에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멍 때리다가, 가끔 ‘멕!’ 하고 큰 소리를 지른다. 대개 밥을 달라거나 놀아달라는 뜻이다. 하얀 고양이에 비해 사냥도 더 잘하고 애교도 많다.
종잡을 수 없는 친구다.
이제는 고양이가 아주 귀여운 존재라는 걸 너무도 잘 안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늘 조용히 자신들의 공간을 지킨다. 사람의 표정과 행동을 관찰하고 곧잘 애교도 피운다. 좋아하는 놀이를 가족과 함께하면 즐거워하고, 주말 하루 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면 만족해한다. 그렇게 살이 통통하게 올라 넙데데해진 고양이 얼굴을 보며, 우리는 ‘못생겼어!’라는 말로 애정을 표현한다.
요즘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면,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현관 앞으로 달려오는 고양이들을 본다. 그런 고양이들을 몇 번 쓰다듬어주다 나도 모르는 새에 잠에 든다. 바쁜 일상에서 점점 두 고양이와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내가 받은 애정의 크기만큼 그들에게 돌려주지 못하고 있다.
알고 있다. 애정과 사랑을 돌려줄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라는 것을. 먼 훗날 조금은 덜 후회하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지금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문득 못생겼다고 놀리지만 말고, 애착 털 공을 한 번 더 던져주는 집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