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승윤 Jan 25. 2024

02. 별명2

<90년생 나는 세상을 이따위로 이해하련다>


02. 별명2


별명으로 놀림을 받다가 결국 개명까지 한다는 사실이 어린 내게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세상 다정하고, 어린 내가 봐도 순진하기만 한 우리 사촌형을 누가 그렇게 놀려댔는지 분한 마음이 일었다.


다만 당시 우리는 초등, 아니 국민학생이었고, 단지 이름 하나 가지고 유치하게 물어 뜯으면서 놀곤 했으니까. 정작 그 화살이 나를 향했을 때는 불편함을 감출 수 없어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말이다. 나 역시 주변 친구들에게 수많은 별명을 지어주며 장난 쳐대면서도, 정작 내 고도비만을 꼬집는 ‘신뚱’이란 별명이 늘 맘에 들지 않았다.




나의 사촌 신주봉은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명절이나 제사 때만 만나는 세 살 터울의 형이다. 다니는 학교가 다르고, 8~9살 소년들의 주 교통 수단이었던 영웅호걸 자전거로 찾아가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기에 서로 얼굴 보는 일은 한 해 몇 번이 다 였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큰집에 갈 때면 사촌형들과 놀 생각에 항상 들떴던 것 같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큰집에만 있는 닌텐도 패미컴을 원 없이 할 수 있기 때문이고(큰집은 거실의 큰 티비 말고도 작은 방 티비가 있어 어른들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지), 어릴적부터 미친 승부욕으로 게임에서 지면 눈물부터 터뜨리던 날 주봉이형은 곧잘 달래줬기 때문이다. 눈물로 이뤄낸 접대 게임이랄까.


그 외에도 주봉이형은 말도 많고, 활동량도 왕성한 나를 잘 보살펴주는 어른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기껏해야 세 살 차이인데 형은 늘 침착하고, 생각이 깊었다. 나와 내 동생이 저지른 온갖 실수에도 싫은 티 한 번 내지 않는, 그래서 어린 내게 형은 당시 티비에서 맨날 나오던 대우자동차 ‘레간자’의 광고카피 같은 사람이었다. ‘소리 없이 강하다’.




그런 신주봉이 갑자기 이름을 바꾼단다. 신우석으로 말이다. 어린 나는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첫째, 사람의 이름을 대체 어찌 바꾼단 말인가? 당시의 나는 우리의 이름이 국가 시스템 내 행정 편의를 위한 부품 중 하나로 작동한다는 걸 몰랐다. 오히려 하늘이 점지해 준 절대 가치로 생각했나보다. 정작 본인은 첫 반려동물인 햄스터를 만날 당시 티비에 탤런트 ‘이제니’가 나오고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니’란 이름을 갖다붙여놓고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 편이 더 하늘의 계시 같기도 하네.


어쨌든 둘째, 대체 이름을 왜 바꾼단 말인가? 난 형이 좋았던만큼 형의 이름을 마음에 들어했는데 말이지. 나의 질문에 우리 엄마는 “학교에서 친구들이 너무 놀려대서 그렇다”라고 답하셨다. 주봉이 사투리로 바지란 뜻이라나. 그게 어쨌다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는 신주봉을 놀려댄 얼굴 없는 자들에게 적개심을 품곤 했다. 근데 왜 바지가 주봉이지? 후에 알고 보니 프랑스어 ‘jupon’이 일본으로 건너가 ‘즈봉’이 됐고, 그 잔재로 우리나라에선 바지나 양복바지를 주봉으로 불렀댄다.


어찌됐든 개명이 있은 이후 집안 어른들부터 나서 “앞으로 주봉이형이 아이라 우석이행이데이” 호칭을 바로 잡아주셨고, 어느새 신주봉이란 이름은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이후 중고등학교 시절 한 번은 형의 방 책상 위 놓인 형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며 “주봉이 시절이네” 했더니 우석이형은 그걸 다 기억하냐는 식으로 씩 웃어보였지. 여전히 침착하고, 편안한 얼굴로 말이다.




지난 설 명절 큰집에서 차례를 모두 마치고 우리 부모님과 내 동생, 아내와 함께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찾았다.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작은 나무, 그리고 ‘신우석의 묘’라 적인 비를 한참 지켜보던 엄마는 입을 뗐다. 아직도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거 같은 기분이라고. 멀리 유학가있는 것 같다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보다 3년 앞서 상경해 자취생활을 시작한 우석이형은 단신으로 새터를 잡는 게 생각보다 외롭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꼈나보다. 하여 이제 막 첫학기를 시작한 나를 만나기 위해 멀리 정릉동에서 필동까지 한 시간 넘는 거리를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며 찾아왔다. 점심으로 무엇이 먹고 싶냐는 형의 질문에 나는 교내 식당에  자리한 버거킹으로 가자고 했다. 웬 햄버거냐는 형의 질문에 나는 와퍼 먹어봤냐고, 진짜 맛있는데 꽤 비싸서 한 번 밖에 못 먹어봤다고 답했다. 당시 우리들의 고향엔 버거킹이 없었고, 나는 진지했다.


와퍼 세트 두 개를 포장한 우리는 운동장이 내려다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서 식사를 시작했다. 우석이형은 “이것 밖에 못 사줘서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무슨 소리냐며 게눈 감추듯 와퍼를 씹어 없애는 나를 보고서 안도한 듯 했다. 그리고는 축구 동아리 애들이 공차는 모습을 보면서 PC게임 ‘풋볼매니저’ 이야기를 나눴었던 기억이다. 난 또 아스날 욕을 한참하고, 형은 웃으며 들어줬겠지.


이후 먼저 입대한 우석이형은 최전방에서 군생활을 했다. 엄마에게 건너 듣기로는 살면서 힘든 내색 한 번 한적 없던 형도 군생활은 쉽지 않았다보다. 물론 말이나 표정으로 드러난 건 아니었다. 면회를 나와 찾은 고깃집에서 허겁지겁 음식을 많이도 먹었다고. 나와 달리 입도 짧은 사람이. 그렇게 형과 나는 군생활 시기가 어긋났고 이후에는 졸업과 취업 등으로 명절 귀경 타이밍이 맞아야만 잠깐 만나 담소를 나눌 수 있게 돼버렸다.




형의 장례식에서 작은 아버지는 “놀지도 즐기지도 못하고 공부만 하다 이렇게 가버리냐”며 오열했다. 형이 공시생이란 핑계로 왕래가 뜸했던 나는 여전히 후회가 많고, 그래서 ‘신우석의 묘’ 앞에 서면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 크다. 나아가 이십대 후반에 떠난 형이 나처럼 삼십대를 넘어 아저씨가 되고, 가정도 꾸리고 했으면 우린 어떤 모습일까 상상한다. 이름 석자로 기억하는 형의 얼굴, 말투, 소리 없이 강한 인품을 떠올리며 말이다.


이후 큰집은 평산 신가 문중이 모인 시골로 자리를 옮겼다. 큰집에서 얼마 안가면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형의 쉼터가 있다. 또 큰집 작은 방 책장 위에는 여전히 형의 별명이자 옛 이름 그대로의 주봉이가 해맑게 웃고 있는 액자가 놓여있다.


이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으면, 또 무엇 때문인지 짜증가득한 내게 조용히 닌텐도 패미컴 조이스틱을 넘겨주던 그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다. 그리고 애써 모은 딱지와 치토스 한 봉지에 딱 하나만 들었던 따조를 내게 나눠주던 작은 손이 기억나는 것만 같다.




나는 인간의 불멸을 믿는다. 그리고 이름은 나를 불멸의 세계로 데려다 주는 문이자 열쇠다. 내가 너를 어떤 이름이나 별명으로 기억하든지 간에, 내가 수많은 존재들 사이에서 너를 부를 수 있다면, 네가 이를 듣고 뒤돌아 볼 수 있다면, 적어도 너는 나의 우주에서 영원히 존재한다. 그것이 사무치는 그리움의 형태일지라도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