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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보나 Feb 28. 2021

우리는 모두 소우주이다

사람이 무서울 때는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정현종, <방문객>





막 20대가 되었을 무렵, 일기에 사람 사이의 관계는 교차하는 두 직선 같다고 적었었다. 서로 다른 곳을 향해 뻗어가던 두 개의 직선이 어느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되고, 나와 그 사람이 가장 가까워지는 '교차점'을 지나고 나면 남은 인생에서 우리는 이제 한없이 멀어지는 것밖에 남지 않은 거라고.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걷고 있고, 수많은 다른 길들과 교차하지만 그 길들이 늘 직선으로만 뻗어가지는 않는다. 때론 같은 자리를 빙빙 돌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휘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한없이 멀어질 뿐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전혀 뜻밖의 지점에서 다시 만나거나 나의 길과는 접점이 없을 것만 같은 다른 길과 마주치기도 한다. 어떤 길은 한순간 교차하고 다시 멀어지지만 어떤 길은 꽤 오랫동안 내 것과 나란히 뻗어갈 때도 있다. 짧든 길든, 이 '마주침'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 의미인지 새삼 깨닫는다.


내게는 세상 모든 마주침이 무겁다. 그래서 때로는 무섭다. 마음속 한 구석에는 언제나 ‘저 사람이 날 미워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맴돌고 있다. 그래서 집에 와서 열심히 오늘의 대화를 곱씹다가 결국 연락을 하고 만다.


‘혹시 아까 내가 한 말, 기분 나빴어?’


나는 때로 사람들이 무섭다.



나는 어떤 사람들의 세계를 지나쳐 왔고, 어떤 사람들은 내 세계를 지나쳐 왔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는 온전한 하나의 세계를 열망하면서도 그저 지나쳐 오기만 했다. 빗물에 젖고 상처가 흐릿해질 때까지 멍하니 서서,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길 앞에서 우두커니 기다리며 입구만 막고 서 있다가, 다른 이들은 이미 떠났음을 나중에야 깨달은 것이다.

장자자, <너의 세계를 지나칠 때>




그것은 그 사람의 '세계'와 마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 한 명 한 명은, 모두 하나의 소우주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상대의 우주와 맞닥뜨린다. 그건 때로 불편하고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신비롭고 놀라운 경험임에 틀림없다.
애초에 상대의 세계를 완벽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요즘은, 할 수 있는 한 상대의 우주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존중하기 위해서 내 우주 또한 단단하고, 넓고 깊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이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 하는 말처럼 인생은 일직선으로 뻗은 고속도로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걷는다.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어떤 모양인지도 모르면서 걷는다. 때로는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원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제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조금씩 처음에 그린 원에서 비껴 나고 있었다는 것을. 원이 아니라 나선을 그리며 걷고 있었다는 것을.

한수희,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때로 제자리걸음을 하며 내 세계의 색이 바래고 좁아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땐 이 글을 본다. 나는 지금 나선으로 걷고 있다. 지금은 같은 자리를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나는 나선을 그리며 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 지루하고 힘든 '나선 코스'가 끝나면, 다시 다른 '층'에서 내 우주가 뻗어나가기 시작할 게 틀림없으니까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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