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리오 Dec 30. 2019

혼자라는 증거와 조건

[도서] 이병률의 『혼자가 혼자에게』

  어린 시절 한겨울 놀러 간 큰집에서의 일이다. 소심했던 나는 누군가의 말에 마음이 상해 집을 나왔다. 가봤자 그 앞에 논과 사이 논두렁뿐이었지만, 기별 없이 사라져 다른 사람을 걱정시키고 싶었다. 나는 무작정 논두렁을 걸었다. 한겨울 회색빛 하늘은 머리에 닿을 만큼 무거웠고, 회초리처럼 매서운 바람은 볼과 손까지 성나게 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것들보다 내 마음이 더 궂었다. ‘내가 사라지면 모두 가슴 철렁하며 미안해하겠지?’

  얼마나 걸었을까? 굵은 눈이 렸다. 더는 무게를 어쩌지 못해 내려앉은 하늘은 지나온 길과 펼쳐져 있던 길을 뿌옇게 지웠다. 슬슬 걱정된 나는 지나온 길을 따라 큰집을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나아가려던 길도 가까이서부터 끊어져 있었다. 그 사이 눈발은 더 거세졌고 사방에선 무서운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고, 뒤돌아보고, 뒤돌아보고, 계속 뒤돌아보고 나니 어디가 돌아갈 길이고 나아갈 길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앞을 보면 하얗게 눈이 멀었고, 감으면 요란한 어둠만 가득했다. 엄한 바람에 더는 서 있을 수 없던 나는 그 자리에서 엎드려 웅그렸다. 너무 무서웠다. 곧 바람에 쓸려 언 논에 나뒹굴거나, 그대로 눈에 파묻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논두렁에는 의지할 곳이 하나도 없었다. 작은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거라곤 금세 수북이 쌓인 눈 속에 얼어 죽은 잡초들 뿐이었다. 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혼자가 혼자에게』, 작가는 책을 통해 혼자 여행하고, 혼자 걷고, 혼자 지내며 한 생각들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하나같이 개인적인 이야기들 뿐이지만, 대부분 공감할 수 있어 글이 참 귀하다. 만약 그의 곁에 누군가 있었다면 입 밖으로 낸 말이야 많았겠지만, 책은 지금보다 얇아졌겠구나 싶어 다행스럽다. 나만 해도 스마트폰의 메모 대부분이 혼자 있을 때 써둔 것이니 말이다.

  책을 보며, 새삼 혼자 있는 시간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따라야 하는 속도가 없다는 것이 한없이 자유롭게 느껴졌다. 원하는 대로 걷고, 내키는 만큼 생각하고, 언제든 눈을 감을 수 있는 것. 당장은 그것들과 바꿀 수 있는 다른 시간이 떠오르지 않았다.


  작가가 혼자 지내며 한 생각대부분다른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과 만나야 할 사람을 그렸고, 만났던 사람과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떠올렸다. 그 사람들을 통해 지난날을 복기하고, 지금을 음미하며, 미래를 그렸다. 그런 생각은 마치 혼자라는 증거나 혼자일 수 있는 조건처럼 필연적이었다.

  그러고 보면 혼자라는 것은 완전히 상대적이다. 누군가 곁에 있더라도 다른 사람 생각에 골몰하면 혼자가 될 수 있다. 반면, 곁에 아무도 없더라도 자신에만 몰두해 다른 것 의식하지 않게 되면 혼자일 수 없다. 나도 작가처럼 혼자 이곳저곳 다니며 만났던 사람이 떠올리고, 이것저것 먹으며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을 그렸다. 그때 나는 스스로가 혼자라고 느꼈고, 명백히 혼자였다. 하지만 모니터를 보며 일에 빠져있을 때 혼자란 사실을 의식해 본 기억은 없다.


  앞서 눈 폭풍 속에 무서워하던 때만큼 다른 사람이 간절했던 적은 없었다. 누군가 그만 날 찾아주길, 웅크리고 있는 나를 일으켜주길, 내 성이나 손을 감싸 지워진 길을 이끌어주길 바랐다.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이 떠오르고, 보고 싶은 사람이 그리웠다. 머릿속엔 온통 다른 사람 생각뿐이었다. 그때 나는 완전히 혼자였고 정말 외로웠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혼자라 느낀 적은 많이 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을 떠올렸으므로.




혼자가 혼자에게 / 이병률 / 달 / 2019


이병률의 『혼자가 혼자에게』 출처 : 교보문고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내 옆에 있는 사람』. 제목만으로도 여전히 우리를 설레게 하는 여행산문집 삼부작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병률 시인이, 5년 만에 신작 산문집 『혼자가 혼자에게』를 펴냈다. 이번 산문집에서 그는 세계 각국을 여행하는 대신, 새로운 곳을 향한 사색을 시작한다. 작가가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것이자, 그리고 깊이 아는 대상인 바로 ’혼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인으로서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일, 여행자로서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일, 그렇게 자연스럽게 오랜 시간 동안 ‘혼자’에 주파수를 맞추어온 그가 써내려간 혼자의 자세와 단상은 세상에 점점이 흩어진 수많은 혼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작가가 써내려간 담담한 문장과 예민하게 포착한 장면, 그리고 특유의 시선을 담은 사진을 통해 ‘나만 할 수 있는 일, 나만 가질 수 있는 것들은 오직 혼자여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출처 : 교보문고


이병률의 『혼자가 혼자에게』 출처 : 유튜브 달출판사 채널



작가의 이전글 수학 공식 모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