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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리스리 Jan 05. 2024

양보 받지 못하는 엄마, 양보 받지 못하는 아이

며칠 전 아버지와 두살배기 딸아이와 함께 지하철을 탔다. 


부모님댁은 서울이고 나는 경기도인지라 아버지가 늘 서울역버스환승센터가 있는 서울역까지 지하철로 배웅을 해주신다. 


이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하철을 탔는데 아이가 피곤했던지 할아버지 품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평상시였다면 내가 아이를 챙기고 아버지가 내 짐을 들어주셨을테지만 아이가 잠든만큼 아버지가 딸을 안고 나는 짐 가방을 메었다. 


경전철에서 서울역이 있는 1호선으로 갈아타면서 내심 긴장이 됐다. 


'1호선은 평일 낮에도 자리 잘 안날만큼 노약자석도 꽉 차기 마련인데, 애까지 잠들어서 큰일이네'. 


역시나 평일 오후였지만 1호선은 사람을 승객을 가득 태운 채로 플랫폼에 도착했다. 


일부러 노약자석 표시가 있는 플랫폼에 서 있었건만, 역시나 모든 노약자석은 만석. 


일반석도 만석이었기에 아버지와 나는 열차가 출발한 뒤에도 자리를 찾아 옆칸으로, 옆칸으로 점점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둘째를 임신한지 4개월차라 임산부 배지까지 가지고 있었지만(나는 항상 손목 잘 보이는 곳에 임산부 핑크 배지를 단다) 임산부배려석도 이미 일반승객이 다 앉아서 만석이기는 마찬가지. 


걷다 보니 마침 자리가 난 핑크좌석이 보여서 '저기에라도 아버지 대신 내가 애를 안고 앉아야겠다' 하던 차에 내 앞에 서 있던 어르신이 얼른 그 자리를 앉으셨다. 


'아, 역시나.'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임산부+노인+아기'의 조합으로 계속 빈 자리를 찾아 전전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핑크 자리를 차지하신 어르신 앞에 서서 배지를 보여드렸다. 


처음에는 나를 빤히만 쳐다보시던 어르신은 어쩐 일인지(?) 내게 자리를 비켜주셨다.(1호선에서 자리 양보를 받을 거라고, 특히나 임산부배려석에 앉은 노인분에게 자리 양보를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해서 살짝 놀랐다) 그 어르신이 자리를 비켜주시자 임산부 배려석 바로 옆자리에 앉으신 승객분도 아버지에게 자리를 내어주셔서 아버지와 나란히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런데 70대이신 아버지가 손녀딸을 안고 있어서였을까. 열차 내에 승객이 어느 정도 빠지는 시점이 오자(물론 그럼에도 모든 좌석은 꽉 차 있었다) 옆자리 다른 노인분께서 "아기 앉혀서 가라"며 일부러 자리를 한 칸 물러 앉으셨다. 아버지는 "아이, 괜찮습니다. 손녀가 자고 있어서요"라고 했는데도 그 어르신께선 몇 번 더 권하셨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 나자,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노인이 아기를 안고 있어서 이렇게 우호적인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산부배려석에 앉으신 노인분이 자리를 비켜주신 것도 어쩌면 젊은 여성인 나보다는 내 뒤에 서 있던 아버지(노년 남성)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을 봐서인 건 아닐까? 


연이어 든 생각은 "과연 내가 혼자 아기를 안고 탔어도 이렇게 자리 양보를 받았을까?"였다. 


딸이 한창 아기띠를 하던 돌 이전 무렵, 동네에서 시내 버스를 탔던 때의 일이었다. 


집까지 몇 정거장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당시 내 손에는 짐이 한가득이었고, 아이는 아기띠를 한 상태였다. 


버스가 오기 전부터 '자리가 만석이면 어떡하지, 서서 가야 하나'하는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임산부 때부터 축적되어온 경험(=자리를 양보받지 못하는 경험)이 엄마가 되어 아이를 낳은 후에도 계속되는 것이었다. 


그동안 임산부로서 대중교통에서 접한 수많은 사람들의 누적된 경험치, 그리고 인터넷에서 비일비재하게 떠도는 여성혐오('임산부면 대중교통에서 양보 못 받았다고 불만 갖지 말고 자차를 이용해라. 꼭 돈 없는 것들이 대중교통을 타고 다녀요'와 같은)가 맞물려서 나는 아기띠를 하고 있는 순간조차도 "양보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불안을 안고 매 순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었다. 


아기띠를 했지만, 손에 짐을 한가득 들고 있었지만, '자리가 만석일 경우, 나에게 자리 양보를 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는 예상은 '역시나' 적중했다. 


퇴근시간도 아니었건만 내가 탄 시내버스는 이미 만석이었고, 카드를 찍고 버스가 흔들리며 출발하는 순간에도 아무도 내게 자리를 권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사님 오른쪽에 앉은 젊은 청년도, 기사님 뒤쪽으로 노란색(노약자)과 핑크색(임산부) 의자커버가 씌워진 의자에 앉은 사람들 그 누구도 나를 본체만체했다. 


'몇 정거장 안 되니까, 10분만 참아서 가보자'라고 마음을 다잡고 버스 급정거에 흔들리지 않게 몸에 힘을 빡 주려던 찰나 기사님께서 외치셨다. 


누가 아기 엄마에게 자리 양보 좀 해주세요!

기사님의 그 한마디에 미동도 없던 승객들 중 한 분이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해주셨다. 


나를 외면하지 않고 그런 외침을 해주신 기사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드는 동시에 '아, 기사님(=버스의 권위자)이 외치지 않았다면 아무도 나에게 양보를 해 주는 사람은 끝까지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산부가 만삭이건 말건 좀 서서 가도 된다는 인식(=두 다리 튼튼한데 뭘 앉으려고?), 아기띠를 한 애 엄마한테 자리양보는 사치라는 인식은 내가 마주하는 생활 곳곳에 있었다. 


임신 중인 여성은 배 안에 품은 아기의 무게도 '마땅히' 견뎌야 하고(네가 자발적으로 가진 애니까), 최소 5kg이 넘는 아기를 아기띠에 맨 여성도 '마땅히' 서서 버텨야 한다는 인식이 우리사회에 성별, 세대를 불문하고 기저에 깔려있는 듯하다. 


젊은 사람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젊은 여자(아줌마)인 너는 그냥 좀 튼튼하니까 버텨라. 흔들리는 버스에서 애 안고 타는 거 아무 것도 아니잖아?'라고 마치 얘기하는 것 같다. 


노인에게도 자리를 양보 안 하는 게 일상으로 굳어버린 사회에서(그래도 임산부, 아기띠한 여성보다는 노인들을 위한 자리양보가 빈도수도 더 높고 아직까지는 우호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나보다 약자인 사람, 불편한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 안 하는 게 '국룰'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누구에게도' 양보 안 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도 적용된다. 붐비는 지하철이나 흔들리는 버스에서 초등생이나 어린 아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어른을 나는 그간 본 적이 없다. 


출산율이 0.7로 바닥을 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아이들은 노인 못지 않게 대접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인터넷에서 흔히 얘기하는 '미래에 세금으로 우리를 부양해 줄 아이들이니까?') 어찌된 게 요즘의 아이들은 내가 아이였을 때보다도 자리 양보를 못 받는 것 같다. 


어린아이들이 지하철에서 "엄마~ 나 자리에 앉구 싶어"라고 볼멘소리를 내는 광경을 자주 목격하는데 그 소리를 들은 근처의 어른승객들 중 그 누구도 엉덩이를 떼지 않는다. 


나는 <양보를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들은 나중에 양보할 줄 모르는 어른으로 큰다>는 말을 믿는다. 


내가 딸아이를 낳은 후로 달라진 점이 있다면 대중교통에서 자리를 찾아 헤매는 부모와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 없이 나홀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부모와 함께 서서 가거나 자리를 찾는 아이를 볼 때면 "여기에 앉으세요"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곤 한다. 


그럼 대부분의 보호자는 "감사합니다"라며 아이를 자리에 앉힌다. 아이는 고마운 마음을 못 느낄지라도 그 부모는 순간 고마운 마음이 생길 것이며, 아이에게는 '어른이 나에게 양보를 해줬다'는 경험치를 선사할 수 있다. (물론 개중에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앉는 부모와 아이도 있다) 


오늘 읽은 책(<맘카페라는 세계>)의 두 문장을 곱씹어본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세상에서 제일 '귀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그 '희귀한' 아이들이 받는 대우는 희한하게도 천덕꾸러기를 넘어 '그 존재 자체가 불편해진' 아이러니를 우린 바라보고 있다"


"그래도 사람들은 저출산과 인구 붕괴를 떠들며 여자들에게 아이를 낳고 키워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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