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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리스리 Jul 18. 2024

나는 임산부석 지킴이입니다.

대체 거기 왜 앉아계신 건데요? 

둘째를 출산하고 처음 타는 지하철이었다. 


이제 더 이상 임산부배려석 표시가 있는 플랫폼에 서지 않아도 되다는 점이 출산 전후의 가장 큰 차이였다. 


그런데 내가 임신중에 결심한 것이 있다면 출산 후에도 '임산부석에 앉지 못하는 임산부들을 위해 대신 나서주자'는 것이었다. 


내가 첫 애를 낳았던 2021년이나 둘째를 낳은 올해 2024년이나 임산부배려석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꼭 맘카페가 아니더라도 직장인 익명앱 블라인드에도 하루가 멀다하고 임산부배려석에 글이 올라온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과 별개로 글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 건 허구헌날 젊은 여자들 아니면 할줌마들이네' '무슨 소리냐, 젊은 남자가 앉은 것도 여러 번 봤다'와 같은 니가 더 못났네와 같은 내용들뿐, 정작 배려받지 못한 임산부에 대한 얘기는 쏙 빠져있다. 


출산을 두 번 겪어보고 임산부를 두 번 해 본 내가 내린 결론은 


성별 나이 구분 없이 그냥 임산부석에 앉고 싶은 사람은 다 앉는다




임산부석에 앉은 사람들의 대체적인 마인드는 '임산부가 오든 말든 알게 뭐야, 일단 내가 힘들어 죽겠는데'이다. 이건 지하철이건 버스건 가리지 않는다. 


모든 임산부석에 앉은 사람을 이렇게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서 일반인이 비어있는 임산부석에 앉고 싶다면(항상 비워두는 게 베스트이지만), 미어캣처럼 매 정거정마다 '이번 역에 임산부가 들어오나? 안 오나?'하며 항상 주위를 살피고 언제든 임산부에게 자리를 내줄 자세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금의 누구들처럼 핸드폰만 보거나 앉자마자 눈을 감아버리는 게 아니라. 


내가 임산부일 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나는 매번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임산부인데 여기 좀 앉을게요"라고 말했다. 


혹자들은 '배려는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서 노인분이 노약자석에 앉은 젊은 사람이나 비노약자에게 "젊은이, 내가 노약자인데 여기 좀 앉겠네"라고 해서 그 노인이 잘못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노인분들이 일부러 노약자석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처럼 임산부들도 임산부 배려석 마크가 그려진 스크린도어 앞에 서서 지하철을 기다린다. 임산부석에 앉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임산부석과 노야자석이 다른 건, 노약자석은 사람들이 '노인들만 앉는 것'이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수렴하는 도달했지만 임산부배려석은 그 이름 때문인지는 몰라도 도입 10년이 넘도로 '너나 나나 다 앉을 수 있는 자리' '임산부가 와도 양보 안 해줘도 되는 자리'로 여전히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임산부가 아니게 되고 출산을 하고 난 뒤에도 지하철에서 자리를 배려받지 못하는 임산부들을 위해서 목소리를 내자고. 


실제로 임산부일 때 옆에서 내주는 응원의(?) 목소리가 임산부에게 큰 힘이 될 때가 있다. 


임신중일 때 지하철을 탔는데 역시나 임산부석에 한 아주머니가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누가 봐도 자고있는 것은 아니고 눈만 감고 있는 상황. 내가 임산부석에 가까이 온 것을 보고도 아주머니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젊은 커플이 나를 위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약간은 호들갑을 떨며 주변에 다 들리도록 대화를 했다.


여: 어머 왠일이야, 앞에 임산부 있는데도 (아줌마) 계속 눈감고 있어

남: 내가 일어나라고 말할까?

여: 와,, 진짜 어떡해. 저게 내 미래야. 

남 : 저건 좀 심하지 않냐? 


남녀의 대화소리 덕분이었는지 아주머니가 실눈을 살짝 떴다. 나는 그새를 놓치지 않고 아주머니에게 "저 임산부인데 여기 좀 앉을게요"라고 말했다. 내가 그렇게 용기를 내서 말할 수 있었던 건 옆에서 분위기를 만들어준 그 커플 덕이었다. 


그래서 출산한 지금, 나는 그 커플들처럼 임산부석 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다. 


임산부가 지하철로 들어오면 임산부석에 앉아있던 사람에게 임산부를 가리키며 "저기, 임산부요"라고 얘기한다. 이렇게 말로 '언급'하며 되짚어주는 효과는 임산부석에 앉은 사람을 일어나게도 만들지만 주변으로도 확산된다. 내가 임산부지킴이 역할을 자처할 때 내 옆에 앉았던 한 남성분은 반대편 임산부석에 앉은 아줌마에게 다가가서 "거기 임산부석이니까 여기 앉으세요"라며 본인의 자리를 양보하고 임산부석을 비워두게 했다. 


노약자석에 노인이 앉는 게 당연하듯 임산부석에 임산부가 앉는 게 당연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 적어도 임산부석에 앉아있었다 할지라도 임산부가 탑승하면 바로 양보하는 '눈치'를 만드는 것. 내가 임산부지킴이를 자처하는 이유다. 


앞으로도 임산부석에 앉은 사람에게 말할 것이다. "여기 임산부석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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