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기자 팀 마샬은 "지리의 힘"에서 지정학이라는 까다로운 소재를 분쟁 지역에서 마치 생중계하듯 박력 있게, 그리고 쉽게 풀어 들려줍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정세를 생각하면, 무려 9년 전 2015년에 출간된 이 책은 크게 고칠 부분이 없을 정도로 균형이 잡혀있습니다. 디테일과 역사적 통찰 모두 뛰어납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긴장감 있는 호흡으로 스토리텔링하듯 굽이굽이 대륙과 바다를 훑으며 지정학, 역사, 정치, 환경, 전쟁사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학자나 연구자가 쓴 책과는 결이 다릅니다. 중동, (구) 유고슬라비아 등 세계 곳곳 굵직한 분쟁 지역에서 발로 뛰고 부대끼며 체험한 본인 이야기가 토대라서 현장감이 넘칩니다. 책상에서쓴 글이 아니라 시큼한 땀 냄새, 독한 탄약 냄새가 묻어납니다.
다 아는 이야기도 완급 조절을 잘한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아프리카나 중동 국경선이 인위적 직선인 이유는 다 알지만, 남북한을 가른 38선 또한 한국에 별 관심 없었을 하위 관리 두 명이 내셔널 지오그래피 지도 하나 달랑 들고 정했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중국이 티베트 이야기만 나오면 경기 일으키는 건 알았지만, 14억 명 급수원인 티베트고원을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속 사정은 잘 몰랐습니다. 사하라가 지구온난화로 계속 넓어져 안 그래도 고통받는 아프리카인을 더 취약하게 내몬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바로 그 아래 식물이 자라고 물도 구경할 수 있는 사헬(Sahel) 지대야말로 매해 황폐해져 분쟁과 비극을 부른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땅덩어리 크기는 세계 1위지만, 부동항(얼지 않는 항구) 하나 없는 러시아가 왜 지리상 불운의 땅인지도, 왜 이렇게 깡패 짓을 하는지도 알게 됐습니다. 재밌는 이야기를 타고 내 머릿속에 들어온 이런 지정학 디테일은 조만간 증발하겠지만, 오랜만에 흥미진진한 독서 경험을 선사해 준 팀 마샬이 고맙습니다.
맘에 드는 작가가 생기면 꼭 유튜브를 켜서 인터뷰나 영상이 있는지 찾아봅니다. 날카롭고 마초다울듯했던 저자는 웬 걸요, 산타클로스 닮은 순딩이 영국 아저씨 이미지였습니다. "지리의 힘"이 대박 난 후 어린이판도 나온 모양입니다. 그림과 지도가 많을 테니 그 책도 탐납니다.
이 책은 밀덕이 좋아할 만합니다. 이웃 나라 간 복잡 미묘한 알력, 민감한 국제 지리 문제를 묘기 부리듯 균형 있게 서술하는 재주에 감탄하지만, 한편으론 전략 전술, 무기 묘사, 국방력 결정론에 좀 치우친다는 느낌입니다. 중국과 러시아가 일대일로건,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공격이건 그렇게 하는 배경을 알려주려다 보니 읽는 사람 입장에 따라서는 중국, 러시아가 (일진처럼 굴어도)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물론 팀 마샬은 군데군데 반대 의견이 치고 들어올 틈을 메꾸는 데 성공합니다. 기사 한 줄 작성해도 반론을 의식해야 하는 직업 습성 때문이겠죠. 지정학 책이라곤 읽어본 기억이 없는 데도 간만에 두툼한 책을 휘리릭 읽어내서 흐뭇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