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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닷다시 May 18. 2023

미운 다섯 살 같은 '정태도'

독서지도사 업무일지 <1>


"미운 다섯 살 같은 '정태도'"
독서지도사 업무일지 #1



오늘 오전에는 평소보다 몸이 더 찌뿌둥했다.     

매주 목요일은 학원 출근을 안 하는 날이어서 더 자도 됐지만, 그래도 아침 9시 전에는 무조건 일어나자는 나름의 결심이 있었기에 일어났다.


월, 화, 수 일하고     

목요일 쉬고     

다시 금요일 일하고.

  

나는 이 구조가 마음에 든다.     

처음에는 안정적인 근로소득이 중요했기에, 원장님이 다른 요일에 더 일해줄 수 있냐고 물어보면 전부 OK를 해서 근무일수를 늘려갔다. 토요일에도. 그래서 이전의 나였다면 목요일도 학원 근무를 하고 싶었을 거다.



어제 원장님이 물어보셨다.     

"선생님, 주 5일 일하는거 괜찮으셔요? 이번 주부터 바로 목요일도 나와서 일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음... 바로는 힘들고, 생각해 볼게요."라고 답했다.

 생각해 본다고는 말했지만, 이미 내 마음은 '일하지 않기'가 확실했다.



독서 학원 근무 특성상 오후 1시부터 저녁 8-9시까지 온종일 서있어야 한다.

내가 칠판 앞에 서서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아이들은 다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고 나 혼자 교실 전체를 움직이며 한 명 한 명 독서지도를 하는 구조다. 때문에 퇴근 후 집에 오면 다리가 퉁퉁 붓는 것은 물론, 앉아있는 아이들에게 종일 허리를 굽혀 독서지도를 해야 하기 때문에 허리에도 무리가 많이 간다.



체력적으로만 힘이 들면 괜찮겠지만, 말을 더럽게 안 듣는 아이가 오는 날이면 기운이 쭉 빠지고 정신적으로도 고되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초등학생이든 중학생이든,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책 읽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잔꾀를 많이 부린다. 내가 아이의 수준에 맞게 읽을 책을 선정해 주면 '이 책은 글 밥이 너무 많아서 오늘 중으로 다 못 읽을 것 같은데요?'라고 처음부터 한숨 푹 쉬고 투덜거린다. 그렇다고 내가 글 밥 없는 책을 골라주면 그때는 또 '책이 너무 어려워서 못 읽을 것 같은데요? 읽을 엄두가 안 나요. 아, 쉬운 책으로 골라주지.'라고 큰 소리로 투덜댄다. 한 명당 1시간 반 수업인데, 그 시간 안에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책들이다. 그냥 이놈들은 책을 읽기가 싫은 거다.


내가 다른 학생 지도하러 가면, 이놈들은 바로 또 멍 때리며 집중 못 하고 앉아 있는다. 때문에 나는 온종일 발에 모터가 달린 듯이 다녀야 하고, 계속 이놈 저놈 고개를 돌려가며 책을 제대로 읽고 있는지 봐야 한다. (그래서 내가 근무 중에 휴대폰을 잘 못 본다. 휴대폰을 볼 시간이 아예 없다.)

 

이 정도면 그나마 다행이다. 초등학생 1-3학년 남자애들이 더 가관이다. 그나마 어른 말 좀 알아 처 듣는 나이가 됐건만, 이놈들은 미운 다섯 살처럼 행동한다. 우리 학원에 내가 개인적으로 '주요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3인방이 있다. 이른바 '정태도'. 세 명의 이름 한 글자씩만 따서 만들었다. 어제는 '정'이랑 '도'가 오는 날이었다.


줄넘기 학원을 다녀서 학원에 등장할 때부터 짤랑짤랑 줄넘기 소리로 요란하게 등장한다. 이놈들은 목소리도 무지하게 크다. 다들 조용히 책 읽고 있는 교실에 이놈들이 등장하면 시끄러워진다. 자기의 학습 파일을 찾아서 연필과 지우개, 스톱워치를 챙겨서 자리에 앉는 것까지 5분이나 걸린다. 열다섯~스무 명 가까이 되는 다른 학생들도 봐줘야 하는데 이놈들이 등장하면 도저히 케어가 안 된다. 가뜩이나 많은 학생들로 정신이 없는데 더 정신이 없어진다.


어제도 나의 인내심이 잠깐 폭발 일보 직전인 때가 있었다.

우리 학원에서는 한 권의 책을 읽으면, 그 책 내용에 관한 10문제를 꼭 풀게 되어 있다. 학생이 책에 집중하며 잘 읽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태블릿으로 홈페이지에 접속해 자기 아이디랑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제를 푼다.



그런데 어제 '도'가 장난을 치는 거다.


도 : "어랏, 왜 로그인이 안 되지?"     

나 : "왜. 잘 눌러봐."     

도 : "비밀번호 g123 맞죠?"     

나 : "응. 맞아."     

도 : "안 되는데요?? g가 이거 아닌가?" 그러고선 'q'를 누른다.     

나 : "그거 아니잖아. g 눌러."     

도 : "g가 이거 아닌가?" 그러고선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내 얼굴을 보며 'a'를 누른다.     

나 : (이 새키가...ㅂㄷㅂㄷ) 내가 정색하고 "똑.바.로. 안. 눌. 러?"라고 말하고서야 제대로 누른다.


'도'는 매번 이런 식이다. 비밀번호를 모를 수가 없다. 그동안 100번은 로그인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은 손을 번쩍 들고 나를 찾는다. 그런데 미운 다섯 살 같은 말 안 듣는 '정태도'가 오면 이놈들 케어하느라 다른 아이들에게 쏟아도 모자랄 나의 정신과 체력을 3-4배 이상 써야 한다. 정말로 진이 쭉 빠진다.


하지만 이놈들을 미워하진 않는다. 응당 어린아이라면 이러는 게 당연하다고도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놈들이 장난칠 때의 얼굴을 살펴보면 정말로 '악의'는 하나도 없다. 그냥 진짜 순수한 '재미'만이 가득하다. 그래서 내가 더 짜증이 나는 거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어차피 이놈들도 어른들이 바라는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어린이들로 '사회화'가 될 것이다. 그래서 굳이 큰소리치며 화를 내고 싶진 않다. 어차피 어른들이 자기가 다루기 쉬운 대로 이 아이들을 제한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로든 행동으로든.


독서 학원에서 일하면서 너무 일찍 철이 든 아이들도 많이 본다. 아직 초등학교 4-6학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아이들은 행동에서든 말투에서든 뭐든 조심하는 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아이들을 보면 괜히 어른인 내가 미안해진다.



'독서지도사'는 속으로 부글부글 인내심이 폭발하다가도 아이들에게 미안해지는 직업이다. 나 역시 내가 다루기 쉽게 어느 정도는 이 아이들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독서 학원 일을 하면서 미래의 나를 상상한다. 엄마가 된 나의 모습.

나에게서 '정태도'같은 아들이 나오면 어떡하지? 정말 심히 걱정이 되다가도, 너무 예의 바른 아이로는 키우기 싫다는 마음도 생긴다. '정태도'같은 아이도 힘은 많이 들겠지만 괜찮을 것 같다.



'정태도'는 학원에 들어올 때도, 나갈 때도 누구보다도 해맑고 큰 소리로 나에게 인사한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그러면 나 역시 해맑고 큰 소리로 인사한다.


"잘 가!! 집에 조심히 가고!! 다음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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