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오마주 에세이
글쓰기 허방에 빠졌을 땐 어김없이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는다. 소설보단 에세이나 대담집을 찾아 읽는다. 작가의 진솔한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40년은 꾹꾹 쓸 이야기를 눌러 담고, 나머지 40년은 뜨겁게 훌훌 풀어낸 작가의 마음이 궁금하다. 귀를 기울이면 다정하면서도 명랑한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너무 초조해하지 말라고. 너무 일찍 작가인 척하지 말라고. 지금은 이야기를 모아야 할 때.
차오를 때까지 기다렸다는 게 지금까지 오래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거 같아요. 경험이 누적돼서 그것이 속에서 웅성거려야 해요.
글쓰기 허방에 빠진 날들이었다. ‘허방’이란 말을 처음 만난 것도 박완서의 글에서였다. ‘허방과 나락’, ‘허방을 밟듯이’란 표현을 보고 뜻을 찾았다. 땅바닥이 움푹 패어 빠지기 쉬운 구덩이. 깨달았다. 나 지금 허방에 빠진 거구나. 잘 걸어가다가도 느닷없이 허방에 빠져 휘청이는 날들이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지. 어쩌면 평탄하게 잘 걸어가는 날들이야말로 귀하기에 무탈한 하루가 그리도 소중한지 모르겠다.
나에게 허방은 도무지 쓸 수 없도록 야멸차게 훼방 놓는 돌봄의 변수들이었다. 3월까지 마무리해야 할 작업이 있었다. 두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2월까지는 글쓰기에 전념해야지 다짐했었다. 하지만 새해 다짐이 무색하도록 1월은 훌쩍 지나갔다. 작업실도 구했지만 절반도 채 나가지 못했다. 아이들의 겨울방학과 병치레, 온 가족의 코로나 재확진과 격리, 남편의 장기 출장, 집안 대소사, 그리고 곧 명절이 다가온다. 명절이 끝나면 유치원 졸업식과 봄방학, 초등학교 입학식이 밀려올 것이다. 일하는 엄마들의 퇴사율이 가장 높은 시기가 아이들 초등학교 1학년 때란 얘기에 겁을 먹는다.
초조해서, 코로나에 확진되었을 때도 가족들 잠든 새벽에 일어나 글을 썼다. 아무리 잠을 쪼개 글 쓸 시간을 구해도 도무지 빠듯했다. 살림이 미워졌다. 밥 짓고 설거지하고 바닥에 쪼그려 걸레를 훔치는 대신에 간절하게, 정말 간절하게 글 쓰고 싶었다. 이쯤이면 나는 허방에 빠진 게 아니라 허방을 파고 있는 걸까. 몸과 마음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휘청이던 즈음, 박완서 에세이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를 읽었다. 피식 웃었다가 오소소 선득했다가 찌르르 뭉클해졌다가, 오랜만에 뜨신 방바닥에 엎드려 재밌는 걸 훔쳐 읽는 사람처럼 뒹구르르 행복했다.
문득 손바닥에 차고 매끄럽고 예쁜 키가 쥐어졌으면 하는 공상을 해 본다. 저 호텔 중 아무 호텔이라도 좋으니 아무튼 호텔 방 하나가 내 것이 되는 것이다. 겨울엔 난방이 되어 있고 여름엔 냉방이 돼 있고, 언제나 나만의 것이고 그게 내게 주어진 데 아무런 조건도 없다. 나는 아주 가끔만 그곳에 갈 것이다. 정말로 혼자이고 싶을 때, 혼자이고 싶은 걸 참을 수 없을 때만 그곳에 갈 것이다. 이 도시에서 완전히 내가 혼자일 수 있는 나만의 방을 갖는다는 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러나 내 손바닥에 그런 키가 있을 리 만무하다. 나는 좀 더 헤매다 어느 다방에 가서 마시기 싫은 커피를 또 한잔 마시고 용건을 마치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내 집, 내 방만큼 아늑한 곳도 이 도시엔 없을 것이다.
307-308p ‘겨울산책’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겨울 거리를 걷던 박완서가 호텔을 발견하곤 ‘아무 방이라도 좋으니 저기 어디 내 방 하나만 있었으면’ 공상에 빠지는 글이었다. 묘하게 재밌고 기쁘고, 또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대단한 작가도 나와 다를 바 없구나. 방이 생긴다면 필시 작가는 틀어박혀 글만 쓸 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는 시간조차도 아까워하면서 글만 쓸 테지. 나도 홧홧한 마음 끌어안고 찬 거리를 걸으며 똑같은 공상을 했었다. 어김없이 헤매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밥 짓고 설거지하면서 생각했다. 이 얘기도 글로 써야지. 글 쓰는 엄마들, 다들 이런 마음 아닌가. 새삼 위로가 된다.
자기만의 방이 뭐람, 자기만의 책상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엄마와 작가. 나에겐 시작점이 같았다. 쌍둥이 형제의 엄마됨과 동시에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9년 동안 다섯 권의 에세이를 썼다. 세 번째 책을 쓸 때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다섯 살, 우리 집에는 책상이 없었다. 대부분 글을 소파에 앉아서 아일랜드 식탁에 서서 썼다. 아이들이 식탁에 앉을 즈음에야 커다란 가족 식탁을 거실에 들여놓았다. 지금껏 거기서 밥도 먹고 글도 쓴다. 밥 먹고 나면 식탁을 닦고서 책과 노트북을 펼치고 쓴다. 줌으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먹던 것 만들던 것 놀던 것들 구석으로 쓱 밀어 두고 급한 작업을 해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엄마와 작가의 정체성이 한데 겹쳐지는 책상 생활을 하고 난 후부터야 스스로 '작가'라는 자각이 생겼다. 이런 식이라면 나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 글 쓸 수 있겠구나. 언제 어디서든 뭐라도 쓰는 순간, 나는 작가가 된다. 일상과 작업과 돌봄이 뒤섞인 작가생활이 내 삶이라는 걸 받아들이자 마음이 편해졌다. 생각해 보면 내가 쓰는 글도 내가 쓰고 싶은 글에도 사람 사는 생활감이 묻어있다. 호텔방처럼 말끔하고 쾌적하진 않지만, 오래 산 집처럼 손길과 흔적이 자연스럽고 정답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서재에서 당당히 글을 쓰는 나는 정말 꼴불견일 것 같다. 요바닥에 엎드려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뭔가 쓰는 일은 분수에 맞는 옷처럼 나에게 편하다. 양말 깁기나 뜨개질만큼도 실용성이 없는 일, 누구를 위해 공헌하는 일도 아닌 일, 그러면서도 꼭 이 일에만은 내 전신을 던지고 싶은 일, 철저하게 이기적인 나만의 일인 소설 쓰기를 나는 꼭 한밤중 남편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하고 싶다. 규칙적인 코 고는 소리가 있고, 알맞은 촉광의 전기 스탠드가 있고, 그리고 쓰고 싶은 이야기가 술술 풀리기라도 할라치면 여왕님이 팔자를 바꾸쟤도 안 바꿀 것같이 행복해진다. 오래 행복하고 싶다. 오래 너무 수다스럽지 않은, 너무 과묵하지 않은 이야기꾼이고 싶다.
383-384p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이래서 나는 박완서 작가의 글이 좋다. 그의 에세이를 읽다 보면 어쩐지 씩씩해진다. 아이들을 돌보고 음식을 짓고 집을 살피고 사람들을 챙기며, 글에만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지었던 한 여자의 부지런한 씩씩함이 훗날 나에게도 전해진다. 엄마와 아내로 가족들을 살뜰히 챙기면서도, 의연하게 시대와 삶을 써 내려간 작가의 삶이 멋지다. 삶의 소소한 행복들을 발견하고 만끽하고 나눴던 작가의 품이 존경스럽다. 글쓰기만 몰두할 수 있는 넉넉한 시간과 근사한 환경을 제공받는 작가들이 세상에 있다면 솔직히 부럽긴 할 테지만, 막상 내가 누리고 싶진 않다. 내 것 같지 않아 불편하고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그저 마음 편하게. 나도 오래 행복하고 싶다. '오래 너무 수다스럽지 않은, 너무 과묵하지 않은 이야기꾼'이고 싶다. 내 손때 묻은 책상에 거리낌 없이 마음을 내어두고서 밥도 글도 삶도 짓고 싶다.
필요한 것이 알맞게 갖춰져 있고 홀로의 시간이 넉넉히 허락된 편안한 내 방이 언제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아릿한 향수와 깊은 평화를 느낀다.
50-51p ‘언덕방은 내 방’
나는 자식들과의 이런 멀고 가까운 거리를 좋아하고, 가장 멀리, 우주 밖으로 사라진 자식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도 있는 신비 또한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남겨진 자유가 소중하여 그 안에는 자식들도 들이고 싶지 않다. 내가 한사코 혼자 살고 싶어 하는 걸 보고 외롭지 않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 (...) 속으로는 '너는 안 외롭냐? 안 외로우면 바보'라는 맹랑한 대답을 하고 있으니, 이 오기를 어찌할 거냐.
58-59p '내가 걸어온 길'
나에겐 자기만의 방도 자기만의 책상도 없지만, 자기만의 시간(대체로 공상처럼 빠져있는)은 있다. 이를테면 '홀로의 시간'. 책에서 작가는 유독 홀로서기, 홀로의 시간이란 말을 자주 한다. 허방에 빠진 참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홀로의 시간을 보내자 싶었다. 바쁜 틈틈이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를 한 꼭지씩 꺼내 읽었다. 그때만큼은 작가의 고백에 홀딱 빠져 홀로의 시간을 보냈다. 책 읽고 글 쓰길 상상하는 시간. 이 시간은 내 머릿속으로만 흐르는 이상한 시간이어서 아무도 내가 홀로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다. 밥 짓고 설거지하고 바닥에 쪼그려 걸레를 훔치면서 ‘이걸 쓸 거야, 저걸 쓸 거야.’ 오랜만에 쓰고 싶은 이야기를 깨끗하게 주워 모았다.
부지런히 바닥을 닦고 있는데 두 아이가 달려와 등에 두꺼비 새끼들처럼 찰싹 올라탄다. 뜨뜻한 체온과 탱탱한 살결과 간지러운 웃음이 달라붙는다. 기우뚱 세 사람이 넘어져 바닥에 나뒹군다. 품을 파고드는 아이들의 뜨끈뜨끈한 숨.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놓쳐버리지 않도록 사라지지 않도록 애써 모아야지. 언젠간 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내 품을 떠나갔을 때 나는 기억하고 쓰면서 덕분에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박완서 작가는 ‘인생의 단맛과 쓴맛, 내 몸을 스쳐간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격렬했던 애증과 애환, 허방과 나락, 행운과 기적’을 내 인생의 명장면들이라고 했다. 우리 인생에 버릴 것은 없다. 심지어 깊숙이 빠져 허우적대는 허방의 시간조차도 내 인생의 명장면인 것을. 장면들을, 이야기들을 꾹꾹 눌러 담아 모은다. 작가의 목소리가 나를 다독인다.
난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냥 살아왔던 시간도 중요하다고 말해 주고 싶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부지런히 살아보는 허방의 시간, 홀로의 시간이 지나간다. 상상해 보자면 서재에서 당당히 글을 쓰는 나도 정말이지 꼴불견일 것 같다.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작가의 삶처럼, 글에만 매몰되지 않고 나와 주변의 삶을 풍부하게 짓고 싶다. 솜털 하나까지도 다 만져보고 느껴본 삶의 이야기를, 오장육부로 부대끼며 겪어본 삶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부지런히 열심히. 그리고 씩씩하게.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21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