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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책 글 여행 Feb 02. 2024

생애 첫 추억 속의 배냇저고리

생애 최초의 기억과 마지막 기억 사이에서






  "엄마, 내가 이렇게 작은 걸 입었어?"

  기와집 아궁이에 방마다 불을 지펴 구들장을 데우던 시절이었다. 엄마와 함께 앉아있는 작은방 창호지 문이 절반쯤 마당 밖으로 열려 있고, 그 사이로 파란 하늘 뭉게구름이 환하게 비추었다. 엄마는 궤짝에서 작아진 내 옷을 꺼내 차곡차곡 정리했다. 나는 엄마 옆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재잘재잘 댔다. 그러다가 엄마가 개키는 옷 중에 하얀색 배냇저고리를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작은 저고리 양쪽 가슴께에 기다란 끈이 나란히 매달린 아가 옷이었다. 너무 앙증맞아서 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단발머리에 앞짱구인 얼굴을 엄마 앞으로 내밀며 나는 배냇저고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런 내가 귀여웠는지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으셨다. 엄마는 3남 2녀 중 막내였던 나를 낳고 더 이상 출산 계획이 없으셔서 작아진 옷들을 작은 집 동생들에게 물려줄 거라고 말했다.

  


  그때가 몇 살 때였는지는 모르겠다. 엄마가 파마머리였던 것도 같고 생머리를 뒤로 올렸던 것 같기도 하고 장면은 선명한데 세세한 부분은 흐릿하다. 가장 어린 시절이었을 것 같은 생애 첫 기억이지만 어느 부분은 상상력이 덧붙여졌을 수도 있고, 훗날 엄마한테 들은 얘기들이 장면에 이야기를 입혔는지도 모른다. 그날 엄마는 노랑 분홍 초록빛이 뒤섞인 멜빵 치마 비슷한 긴 치마를 입었다. 엄마 나이 서른셋에 나를 낳았으니까, 엄마는 30대 중후반이었고 나는 서너 살쯤 되었을까. 엄마 품에 안기거나 업히면 통통했던 엄마 살집이 포근하게 잡히며 무척이나 따뜻했다. 큰 방에서 온 가족이 텔레비전을 보고 잠잘 시간이 되면 엄마 등에 매달려 가느다란 두 팔로 목을 감았다. 부엌으로 난 문을 통과해 작은방으로 자러 가던 기억이 떠오른다.



  배냇저고리와 잠을 자러 가던 두 기억 중에 어떤 날이 더 먼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즈음의 나는 허약했고 빼빼 말랐다. 엄마 손에 붙들려 억지로 약을 먹는 일이 잦았다. 자주 아파 힘이 없어서인지 타고난 기질인지 사납게 울어본 기억이 없다. 엄마 말로는 아픈 짓거리하는 거 말고는 유순해서 손가는 게 없었다고 하셨다. 그렇게 스스로 기억하는 생애 첫 기억은 아마도 세상 속에서 몇 해쯤은 보낸 후였을 것이다. 내 삶은 그렇게 엄마의 온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생애 첫 기억을 업고, 세월은 그때 엄마 나이보다 더 많은 나이를 내 삶에 쌓아 올렸다. 엄마가 나를 낳았던 나이보다 몇 해 더 빨리 나도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성장해서 내가 결혼하던 당시의 나이가 임박했다. 그리고 엄마는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였던 나의 할머니처럼 세월에 밀려나 흰머리가 검은 머리보다 훨씬 많은 '할머니'가 되었다. 어릴 적에는 엄마 품에 안기거나 등에 업혀 매달려도 끄떡없었는데 이제 지팡이를 짚고 걸으신다. 같이 외출할 때면 혹시라도 넘어지실까, 내가 엄마의 팔을 붙들고 걷는다. 나는 어릴 적 엄마 품에 매달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엄마는 옆에서 붙들어 주는 것을 싫어하신다.

  "내가 애냐? 혼자서 걸을 수 있어."

  "엄마, 나이 들면 거꾸로 애어른이 되는 거야.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날 돌봐줬으니까 이제 내가 엄마를 돌봐주는 게 당연하지. 우리 품앗이하는 거야."

  자식한테 의지해서 걷는 걸 누가 볼까, 자존심 상해하시는 엄마와 나는 농담처럼 토닥거린다. 엄마 마음을 헤아려 팔짱을 끼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잡아드리려고 해보지만 금세 눈치채신다.



  엄마와 나는 가까운 동네에 산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엄마와 얼굴도장을 찍기 위해 시간을 비워놓는다. 80대 중후반인 엄마는 60년 세월 함께했던 아버지를 작년에 떠나보내고 혼자가 되셨다. 뜨거운 햇살이 내려앉는 오후가 되면 운동 삼아 지팡이를 짚고 모자를 쓰고 산책하러 나가신다. 며칠 전이었다.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동네 할머니와 산책로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았다. 엄마는 외출복 차림으로 깔끔한 성격만큼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한참 동안 엄마의 등을 바라보았다. 생애 첫 기억 속에 거인처럼 느껴졌던 엄마의 어깨가 왜소하고 작아 보였다. 엄마 어깨 위로 긴 세월이 햇살에 반짝거렸다.



  인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생애 첫 기억은 흐릿하게 남아 있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생에서의 삶을 끝내고 돌아가는 날이 언제인지, 어디로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생애 첫 기억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생애 마지막 기억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생애 최초의 기억과 마지막 기억 사이를 메워줄 '오늘'의 기억들에 온기를 만들어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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