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과 파트너십 사이 (2)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이름난 식료품 기업에서도 우리 제품을 아주 많이 사서 쓰고 있다. 그 큰 회사에서 일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제품을 쓰다 보니 온갖 특이한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이 고객사에서 우리 제품을 가지고 만든 시스템에 아주 심한 오류가 생겼다. 솔직히 말해서, 고객이 제품을 잘 모르면서 함부로 다루다 보니 사고를 친 것에 가깝지만, 고객 입장에서는 제품이 몹쓸 물건으로 보일 터였다. 중요한 고객이라 신경을 많이 써야 하기 때문에 일단 제조사의 영업 담당자와 엔지니어가 고객사를 찾아가서 문제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제조사의 엔지니어는 문제를 고치기는커녕 더 망치기만 했다. 결국 우리 회사 엔지니어가 뒤늦게 그 문제를 떠맡았다. 우리 엔지니어는 며칠 밤낮을 씨름한 끝에 그 문제를 겨우겨우 풀어냈다. 고객사의 시스템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그 후로도 이런 일이 몇 번 더 있었다. 그러자 고객은 제조사 사람들을 점점 믿지 않게 되었다. 결국 이 고객사의 담당자는 제조사 사람들과는 만나거나 이야기 나누고 싶지 않으니 자신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선을 그어버리기까지 했다.
사람 일은 나중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특히 비즈니스로 만난 사이라면 더더욱 이처럼 관계를 칼로 무 자르듯 끊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고객사 담당자가 이 정도로 딱 잘라서 말했다는 것은 그 정도로 마음이 상했다는 뜻으로 보였다. 대신 고객과 우리 회사의 관계는 그만큼 가까워진다. 내가 직접 관리하는 고객이 아님에도, 우리 회사와 이런저런 일들을 워낙 많이 하는 곳이다 보니 나도 이 고객사 담당자와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를 만날 때마다, 그가 우리 회사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믿고 대한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나를 가깝게 대해주었다.
반대로 제조사의 영업 담당자는 이 고객에게 직접 연락하기가 어렵다 보니 속이 많이 탔을 것이다. 가끔 고객에게 연락을 해도 받지 않거나,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만 대답을 하니 연락을 계속하기도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고객에게 연락을 해야 할 때면 항상 우리 회사의 영업 담당자에게 부탁하고 있다. 나는 이 관계가 무척 특이하다고 생각한다. 이 고객과의 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제조사는 우리 회사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고객과 관련된 업무를 할 때는 자연스럽게 우리 회사가 제조사보다 높은 곳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 고객사에서 일어나는 일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제조사와 파트너사의 관계를 일방적인 갑-을 관계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제조사 직원이 파트너사와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면 파트너사를 마치 하청업체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럴 때면 내가 미국에서 겪었던 것처럼 제조사 직원이 파트너사 직원에게 갑질 아닌 갑질을 하게 된다. 물론 제조사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파트너사를 하청업체 대하듯 대하는 것은 아니다. 파트너사 직원들을 함께 일하는 동료로 대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리고 그들이 일을 잘하고 실적도 좋았던 것 같다.
그들의 실적이 좋았던 이유는 간단하다. 제조사와 파트너사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각자의 역할을 잘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우리 제품의 공급망이나 지휘 체계를 생각해 보면 미국의 본사 - 일본의 지역 본부 - 한국의 지사 - 한국의 여러 파트너사로 이어진다. 비즈니스를 잘하기 위해서는 이 전체적인 그림 속에서 각자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 예컨대 제조사는 제품을 개발해서 시장에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또 다른 제품들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을 세운다. 파트너사는 시장의 최전방에서 고객들이 제품을 잘 쓸 수 있도록 돕는 한편, 제조사의 비즈니스 전략이 시장의 가장 세세한 곳에 스며들도록 한다. 그래서 제조사와 파트너사의 관계는 단순히 갑-을 관계로 틀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