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보고의 굴레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올해는 역시나 경기가 좋지 않다. 우리 고객들의 소식이라고는 온통 그들의 실적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뿐이다. 고객들은 이럴 때면 쓰던 돈은 줄이고, 쓸 돈은 되도록이면 안 쓰려고 한다. 이런 분위기는 특히 IT 투자에서 티가 많이 난다. 고객들은 경기가 좋으면 비싸더라도 성능이 좋은 제품을 사지만, 경기가 안 좋으면 성능이 좀 아쉽더라도 싼 제품을 사려고 한다. 우리 회사에서 파는 제품은 다른 제품들보다 성능이 좋은 대신 가격이 비싼 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고객들이 우리 제품에 대한 투자를 점점 줄이려는 게 느껴진다. 한편으로 새로운 고객을 만나는 일도 갈수록 없어지는 것 같다.
이렇게 경기가 안 좋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영업 사원들은 시장 상황이 어떻든 간에 계약을 따내고 물건을 파는 대가로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다. 회사에서도 매출을 만들어내기 위한 모든 일을 영업 사원에게 맡겨놓기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영업 사원들로 하여금 일을 더 열심히 하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쓴다. 그중에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은 영업 사원들이 어디서 뭘 했는지 주마다 달마다 보고하도록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영업 사원은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고객을 만날 일이 많다 보니 일반 사무직보다는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 영업 사원들이 그 자유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회사에서 꼼꼼히 체크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실적이 좋다면 영업 사원들이 뭘 하고 있는지 보고하라고 시키지도 않는다. 초보 영업 사원들은 일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매일 업무 보고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영업 사원들이 이런 식으로 보고를 하는 경우는 잘 없다. 우리 회사 부장님은 만약 회사가 영업 사원들더러 업무 보고를 시킨다면 그것은 곧 실적이 너무 안 좋으니 회사를 그만두라는 메시지라고도 했다. 그런데 요즘처럼 경기가 안 좋아서 실적이 나빠지는 때에는 업무 관리를 꼼꼼히 하기 위해서 보고를 하라고 시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주간 보고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나도 왠지 더 긴장하게 되었다. 보고할 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라도 전보다 부지런하게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대표님이 주간 보고를 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 단순히 영업 사원들을 관리하기 위해서만은 아닌 모양이다. 얼마 전에 우리 회사의 주인이 바뀌었다. 어느 사모펀드 회사에서 우리 회사의 지분을 전부 사들였기 때문이다. 그 사모펀드 회사는 자신이 투자하고 있는 회사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꼼꼼히 체크한다고 한다. 그 사모펀드의 회장님은 기업인으로서 우리나라의 IT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IT 정책을 만드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신 분이라고 한다. 그런 분이 직접 주간 보고를 챙겨보신다고 하니, 그 사모펀드로부터 투자를 받은 회사들은 그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 사모펀드에서 우리 회사 주식을 사면서 대표님은 엑시트를 한 번 한 셈이다. 모르긴 몰라도 대표님은 자신이 가진 주식을 다 판 대신 돈도 꽤 많이 벌지 않았을까. 그래서 우리 회사가 사모펀드에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대표님이 부럽기도 했고, 내가 평생 만져보지도 못 한 큰돈이 오가는 거래가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아득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대표님조차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업무 지시를 받고, 또 매주 어떤 일을 했는지 보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나서는 갑자기 산다는 게 다 뭔가 싶어 답답해지기도 했다.
돈을 많이 벌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우리 대표님 정도면 그런 자유에 꽤나 많이 가까워졌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 주간 보고 에피소드만 봐도 그렇듯이, 아예 아무런 간섭이나 지시를 받지 않는 자유를 얻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아마 사모펀드의 회장님도 또한 누군가로부터 간섭이든 압박이든 받지 않을까. 사업을 잘해서 돈을 많이 벌어도 이 끝도 없는 계층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나 보다. 하지만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 한낱 중소기업 영업 사원에게는 주제넘은 걱정인 것 같다. 얼른 주간 보고나 마저 쓰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