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하면 안 하는' 사람에게도 사연이 있다
'웬만하면 안 하는' 원칙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서 원래부터 그렇게 소극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들도 삶의 어떤 부분에서는 '일단 한 번 해 보는' 원칙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나와 취향, 욕구, 가치관 같은 것들이 다르다 보니, 같은 상황을 마주했을 때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한 가지 사례만 가지고 사람을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도 당연히 안다.
얼마 전부터 우리 회사 엔지니어가 고객사에 들어가서 일을 하고 있다. 분명 업무 범위와 기간에 대해서 고객과 한참 논의한 다음 정했고, 그 내용으로 계약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고 나니까 고객사 담당자가 점점 많은 일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그 담당자에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름대로 있었다. 다음 달에 임원 보고가 갑자기 잡혔는데, 그때까지 어느 정도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우리 프로젝트가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회사 엔지니어 팀장님께 이 사연을 전하고, 고객사 임원 보고 전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다시 정리해야 했다. 그에게 고객이 지금 왜 이렇게 업무를 많이 요청하는지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 '나는 맥락 같은 건 관심 없어'라고 내 말을 잘랐다.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말에 짜증이나 화 같은 감정이 묻어 있지 않아서 나도 빠르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엔지니어와 영업 사원의 입장은 아주 많이 다르다. 영업 사원은 고객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이것도 저것도 다 해주고 싶어 한다. 그래야 실적을 조금이라도 더 올릴 수 있을 것 같아서다. 하지만 엔지니어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고객이 해달라는 걸 다 해주려다 보면 그들로서는 1년 365일 퇴근하지 않고 일만 해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니 영업 사원이 '일단 한 번 해 보려는' 일에 대해서 엔지니어는 반대로 '웬만하면 안 하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영업 사원은 기술 검증, 베타 테스트 같은 것들은 '웬만하면 안 하고' 싶어 한다. 영업 사원들은 보통 언제까지 얼마를 팔아야 한다는 실적 목표를 받는다. 그런데 기술 검증이나 베타 테스트 같은 것을 하느라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갈수록 주어진 시간 안에 목표를 채우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엔지니어들에게 기술 검증 같은 일은 '일단 한 번 해 보는' 일을 넘어 '꼭 해야 하는' 일이다. 그들에게는 빨리 파는 것보다 제대로 된 것을 파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엔지니어들에게 영업 사원이 전하는 맥락이나 사연 같은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고객이든 자기 나름의 사연은 있게 마련이다. 그 사연이 딱하다는 이유로 자신이 할 수 없는 일까지 다 받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영업 사원 여러 명이 각자 맡은 고객의 사연을 전하면서 엔지니어에게 일을 부탁할 텐데, 그 사연들의 무게를 일일이 따져가면서 일을 하기는 어려울 터이다.
이런 점에서 영업 사원에게는 의사소통 능력이 아주 중요한 것 같다. 고객이 무리한 요구를 할 때, 그것을 '일단 한 번 해봐야' 할지, 아니면 적절히 거절해야 할지 잘 판단해야 한다. 또한 자신과 함께 일하는 엔지니어들이 어떨 때 '일단 해보려고 하'는지, 또 어떨 때 '웬만하면 안 하려고 할'지도 잘 알고 있으면 좋다. 그러면 '웬만하면 안 하려고' 하는 엔지니어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일단 한 번 해볼까?'라고 생각하도록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